"백제를 구하라"... 백제부흥에 국운 걸었던 일본 천황

박광홍 입력 2023. 5. 3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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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史람] 일본사에 획을 그은 백제의 기억... 한일관계에 주는 교훈

[박광홍 기자]

▲ 을사의 변을 묘사한 에도 시대의 그림 나카노오에 황자는 직접 칼을 들고 소가노 이루카를 습격했다. 전승에 따르면 나카노오에 황자가 소가노 이루카의 목을 베자 그 머리가 80m를 날아갔다고 한다.
ⓒ wiki commons
 
서기 645년 6월 12일, 고대 일본에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대사건이 벌어졌다. 한반도에서 온 삼한(三韓)의 사신들을 맞이한 자리에서 칼부림이 난무하는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을사의 변'/乙巳の変). 정변의 주동자는 고쿄쿠 천황(皇極天皇)의 아들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였다. 부하들이 주저하는 가운데, 그는 몸소 칼을 빼어들고 당대의 권신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습격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란 소가노 이루카는 고쿄쿠 천황 앞에 엎드려 무고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당시 무력했던 천황은 외국 사신들의 면전 앞에서 유혈사태를 벌인 아들을 제지하지 못한 채 하릴없이 자리를 피했다. 그동안 전권을 휘둘러왔던 소가노 이루카가 참살되고 천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가운데, 이제 사람들은 누가 일본의 진정한 주인인지 알게 되었다. 이날 이후로 사실상 일본을 통치하게 된 나카노오에 황자는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을 단행하며 국가의 기틀을 정비하였고. 훗날 덴지 천황(天智天皇)으로 즉위하게 된다.

나카노오에 황자, 즉 덴지 천황은 일본사 뿐 아니라 한반도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것은 덴지 천황이 주동한 을사의 변이 한반도 사신들이 입회한 자리에서 벌어졌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온 치세에 걸쳐 당과 신라의 공세로 망국의 설욕을 당한 형제국 백제인들을 지원했다. 덴지 천황이 전임 천황의 사후로도 즉위를 7년이나 미뤄가며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고대 일본의 문화와 질서가 태동하는 데 있어 백제는 주요한 영향을 끼친 우방국이었다(관련기사: 백제 승려 목조상 유심히 본 일본 학생의 한마디).

의자왕이 당으로 압송된 이후 일본에 머물던 백제왕자 부여풍을 귀국시켜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으로 삼게 한 데 이어,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소탕전과 내분으로 인해 위기에 빠지자 27000~42000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해 구원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50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가용병력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파병을 강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있어 백제부흥은 그야말로 일본의 국운을 건 필생의 과업이었던 것이다.
  
실패로 끝났지만... 가족처럼 가까웠던 백제-일본, 고대 한일관계의 의미
▲ 덴지 천황 초상(1899년) 을사의 변으로 정권을 잡은 나카노오에 황자는 훗날 덴지 천황으로 즉위한다. 그는 백제부흥운동 지원을 위해 사활을 걸었던 일본의 천황으로도 유명하다.
ⓒ wiki commons
 
덴지 천황과 일본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백제부흥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 663년의 백강전투(일본측 명칭 백촌강전투/白村江の戦い)에서 혈전이 거듭된 끝에 백제-일본 연합군은 당 수군의 화공으로 궤멸되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부여풍은 잔존 백제부흥군 세력들 버리고서 고구려로 도주했고, 지도자와 핵심전력을 상실한 백제부흥군 세력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 수많은 백제인들이 난민 신세가 되어 일본에 의탁하였으니,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으로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는 백제인들의 절규를 끝으로 백제부흥운동에 관한 기록에 마침표가 찍힌다.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백제 구원을 위해 시작했던 덴지 천황의 전쟁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덴지 천황은 일본으로 건너 온 백제유민들을 위한 봉토를 마련해주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일본 사회로 편입시켰을 뿐만 아니라, 백제를 멸망시킨 당과 신라에 대한 경계 역시 늦추지 않았다. 견당사를 파견하는 한편 신라, 탐라 등과의 교류를 강화한 것은 나당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동아시아 질서 내에서 살 길을 찾고자 했던 외교다각화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일본 본토 침공 우려는 현실적인 위협인 동시에 정권 강화의 좋은 명분이었다. 백제 다음 차례는 일본이 될지도 모른다는 백성들의 불안과 공포, 빼앗긴 고토를 수복하고자 하는 백제 유민들의 염원 등은 축성, 봉화 건설, 신식 군사제도의 설치 등 이후 현실정치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특히 667년, 일본 본토 침공이 벌어질 시 해안으로부터의 공세에 취약한 기존의 수도 아스카를 버리고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분지지형의 내륙부 오미오츠노미야(近江大津宮)로 천도를 단행한 것은 그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미이데라에서 내려다보이는 오츠시와 비와호 전경 당이나 신라의 일본본토 침공을 염려한 덴지 천황은 오미노오츠노미야(오늘날의 오츠시)로 전도하였다. 한편, 사진 속 미이데라의 금당에는 백제불상이 본존으로 안치되어 있다. 백제본존은 1300년 동안 비공개 상태인 비불이다.
ⓒ 박광홍
  
▲ 오츠시의 '도래인역사관' 백제유민들이 터를 잡았던 지역 중 한 곳이자 덴지 천황이 일본 본토 침공 방어를 위해 천도를 단행했던 오늘날의 오츠시에는 도래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사진 속 전시물에는 백제 구원을 위한 일본의 노력,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유신들의 활약 등이 기술되어있다.
ⓒ 박광홍
 
천도에 대한 반발을 안보 논리로 억누르고 오미오츠노미야로 옮겨간 덴지 천황은 이듬해 7년 간 미뤄왔던 즉위식을 거행하였으니, 그가 22년 전 소가노 이루카를 참살하고 거머쥐었던 정권은 백제를 멸망시킨 원수들의 존재로 명실상부하게 완성된 셈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일본이 스스로 '왜국'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일본'이라 칭한 것은 670년으로, 덴지 천황이 천도를 단행하고 정식으로 즉위한 직후의 일이다.

덴지 천황이 우려했던, 혹은 정치적으로 이용했던대로 일본이 백제 다음 표적이 되어 당이나 신라의 전면적인 침공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 멸망을 기점으로 덴지 천황이 뿌렸던 씨앗은 이후로도 일본 역사의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백제가 멸망한지 2세기가 흐른 8세기 중엽에도 일본에서는 발해와의 협공을 전제한 신라침공 계획이 입안되고 준비되었다.

물론, 중국이나 신라에 배타적인 일본의 대외정책에 백제 유민들과 그 후손들이 가장 큰 지지자가 되어주었으리란 점은 충분히 유추 가능한 지점하다. 덴지 천황이 적극적으로 거두었던 백제 유민들은 성공적으로 일본 사회에 편입되었으니, 의자왕의 자손들은 일본 조정으로부터 '백제왕'(百濟王)씨를 사성 받았으며, 백제왕씨 및 그 선조인 백제 왕실에 대한 제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관련 기사: 일본인들도 새해맞이 참배하는 '백제왕 신사'). 794년 교토로의 천도를 단행하여 헤이안 시대를 열었던 간무 천황의 무령왕의 자손이고 간무 천황 자신이 모계로 이어지는 백제 왕통을 자신의 입지 강화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관련 기사: 일본의 '육탄돌격'이 세계사에 남긴 그림자).

요컨대, 덴지 덴노의 백제부흥운동 지원은 가족처럼 가까웠던 고대 한일관계의 단면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친밀한 관계는 백제 멸망을 기점으로 무너졌지만, 백제에 대한 기억은 일본사의 향방에 계속해서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 삶을 이어나갔던 당시 백제유민들의 흔적 역시 현대에도 여전히 생생하다. 이렇듯 형제와도 같았던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구상하는 작업 위에서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의 백제왕신사(2020년 1월 1일) 백제 멸망 후 일본 조정은 의자왕의 아들 혹은 손자 부여선광에게 오늘날의 오사카 지역에 봉토를 마련해주었다. 백제왕씨를 사성받은 부여선광의 자손들은 이후 일본의 지배층으로 편입되었다.
ⓒ 박광홍
   
▲ 오사카의 백제교 터 백제유민들이 특히 대량으로 유입되었던 오늘날의 오사카 지역에는 백제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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