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욱일기를 못 알아보느냐... 일본의 호통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3. 5. 3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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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과거와 데자뷔, 욱일기 달고 부산 입항한 일본 해상 자위대

[김종성 기자]

 다국적 해양차단훈련 ‘이스턴 앤데버23’에 참가하는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 하마기리함이 욱일기의 일종인 자위함기를 게양한 채로 29일 부산 남구 백운포 해군작전기지에 입항했다.
ⓒ 김보성
 
일제 식민 지배 문제가 한창 논란인 이 시점에 욱일기가 부산에서 펄럭였다. 해상자위대 호위함 하마기리함이 욱일기의 일종인 자위함기를 게양하고 29일 오전에 부산 해군작전기지로 입항했다. 31일 열리는 '이스턴 앤데버 23' 연합훈련 참가를 명목으로 자위함기가 한국에서 휘날리게 된 것이다.

자위함기를 게양한 하마기리함은 <동아일보>가 1997년에 도쿄 특파원 발로 보도한 '일 군국주의 꿈틀거리나'라는 기사에도 등장했다. 세계적 탈냉전에 맞서 일본 극우세력이 꿈틀대던 때인 그해 10월 28일 나온 이 기사는 "26일 도쿄 앞바다 사가미만에서 벌어진 일본 해상자위대 열함식은 일본 군사력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행사"였다고 한 뒤, 이 이벤트에 대한 국민적 열기를 조성할 목적으로 방위청이 사흘간 승선시킨 연인원이 무려 6만 명이라고 전했다.

기사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헬기로 직접 날아와 선두 함선에 섰다"고 한 뒤 그가 "우리의 과제는 이 지역과 자국의 안전 및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라며 자위대의 역할 확대를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등장한 방위청 관계자는 남북한과의 군사력 경쟁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동승했던 한 방위청 관계자는 '일본 해상자위대는 작전이나 기술 면에서 노하우를 갖고 있다. 한국의 이순신 장군 전법도 알고 있다. 북한 잠수함 등은 별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단언했다"라고 기사는 보도했다.

하마기리함이 욱일기를 달고 한국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윤석열 정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다. 지난 25일 국방부 정례브리핑 때 전하규 대변인은 "통상적으로 외국항에 함정이 입항할 때 그 나라 국기와 그 나라 군대 또는 기관을 상징하는 깃발을 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이건 전 세계적으로 통상적으로 통용되는 공통적인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군함이 외국에 들어갈 때 자국 깃발을 단다는 것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국방부 브리핑은 한국에서 욱일기 논란이 벌어지는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한 동문서답 같은 입장 표명이다.

침략의 상징  

일본이 이 땅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던 시절과 강점하고 지배하던 시절에 일본인들과 그 군대의 선두에 있었던 것이 일본기다. 국기인 일장기나 군기인 욱일기는 한국을 침략하는 대열의 맨 앞에 있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여는 서막인 1875년 운요호 사건(운양호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를 침범하자, 조선 수군은 방어적 군사행동에 착수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함포 공격을 가해 조선군에 피해를 줬다. 그런데도 일본은 시비를 걸었고, 이로 인해 양국이 협상을 하게 됐다. 이때 특명전권변리대신인 구로다 기요타카와 부대신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에 와서 했던 말이 '일본기도 못 알아보느냐?'는 것이었다.

음력으로 고종 13년 1월 19일 자(양력 1876년 2월 13일 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음력 1월 17일 회담에서 조선 측은 '남의 바다에 통지도 없이 들어왔으니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구로다 특명대신은 '운요호에 국기를 달았다'며 '어째서 우리 배를 알아보지 못했느냐'고 엉뚱한 논리를 들이댔다. 영해 침범을 문제 삼는 조선 측 앞에서 '왜 우리 깃발을 못 알아보느냐?'며 동문서답 식으로 따진 것이다.

이 시비에서 결국 조선이 굴복했다. 그 결과, 음력 2월 3일(양력 2월 27일)에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체결됐다. 시장 개방을 허용한 이 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 경제를 잠식했고, 이를 발판으로 1894년에 청일전쟁과 동학혁명 진압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조선을 정치적으로 장악했다. 그런 뒤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고 1910년에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일본기도 못 알아보냐며 시비를 건 도발이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을 기념할 때도 욱일기를 활용했다. 작년 12월에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제69호에 수록된 김종옥 한림대 연구원의 논문 '일제강점기 해외 풍자만화를 통해 구축된 조선의 표상'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식민지 조선과 전쟁미술>을 인용해 일본이 발행한 '한일병탄 기념엽서'에 관해 이렇게 해설한다.
 
이 엽서에는 총리 이완용과 3대 통감 데라우치의 사진 아래 조선의 궁(경복궁 앞 광화문) 주변으로 욱일기를 배치하고 홰를 치는 듯 꼿꼿하게 서 있는 닭을 그려넣었고, '한일병합=조선의 여명'이라는 프레임으로 일본의 동아시아를 향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정당화한 것이다.
 
 
 본문에 인용된 일본 엽서
ⓒ 민족문제연구소
 

일본인들과 일본 군대가 짓밟던 시절의 한국 땅에는 일장기나 욱일기가 펄럭였다. 서울 용산은 물론이고 한국 곳곳에 일본기들이 나부꼈다. 그 아래에서 한국인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수확물을 강탈당하는 것도 모자라, 위안부로 강제동원되고 징용이나 징병으로 강제동원됐다. 그런 점에서, 일장기나 욱일기는 한국 땅에서 흉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역사가 있는데도 윤 정권은 "통상적으로 외국 항에 함정이 입항할 때 그 나라 국기와 그 나라 군대 또는 기관을 상징하는 깃발을 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욱일기의 한국 재진입을 당연시했다. 다른 깃발도 아니고 욱일기다. 다른 시점도 아니고, 식민 지배 논란이 다시 뜨거워진 시점이다. 역사적 맥락은 물론이고 지금의 시대적 맥락까지 도외시한 해명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의 '한' 자극 

일장기나 욱일기가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됐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있었다. 박정희의 굴욕외교로 인해 서울에서 일장기가 다시 펄럭이게 된 1965년에 그 장면이 벌어졌다.

시나 에쓰사부로 외무대신이 한일기본조약 가조인(1965.2.20)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울에 들어온 그해 2월 17일이었다. 그날 발행된 <동아일보> 1면 중하단에 따르면, 시나 외무대신이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동안에 그 일행을 겨냥한 산발적인 시위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숙소인 조선호텔 앞도 수십 명의 시위대로 붐볐다.

이날, 시위대와 전혀 무관한 한 여성이 이 호텔 근처에서 갑자기 멈춰 선 모습이 <경향신문> 기자의 눈에 포착됐다. 그날 발행된 이 신문 1면 최하단은 "남루한 옷을 걸친 노파 하나가 하늘 한구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길 위에 못 박힌 듯 서서 떠날 줄을 모르던 그 노파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대잎처럼 야윈 손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고 한 뒤 이렇게 전했다.
 
노파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엔 일장기가 있었던 것이다.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 간만에 보는 깃발. 조선호텔의 국기게양탑 위에서 붉은 일장기는 너무나도 선연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굴욕외교의 결과로 일본기가 다시 펄럭이게 된 1965년 이해에 20대 중반 이상인 사람들은 식민 지배를 경험한 세대였다. 일장기를 보고 멈춰 선 그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이 멈춰선 이유와 관련해, <경향신문>은 일제 징용이나 공출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거나 아들이 "일장기를 가슴에 두르고" 끌려갔거나 남편이 그렇게 됐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 시절에는 그 연령대 여성 대부분이 남편이나 아들을 그런 식으로 빼앗겼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렇게 보도할 수 있었다.

기사는 "그 노파만이 아니었다"라며 "지나가던 시민들은 한번씩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라고 말한다.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 한숨을 내쉬는 사람, 냉소를 보내는 사람, 분노의 침을 뱉고 지나치는 사람, 사람들마다 무엇인가 모두 쓰라렸던 과거의 기억을 되앂고 지나는 것이다"라고 묘사했다. 그러고 난 뒤 "이제 새삼스럽게 남의 나라 깃발에 관심을 가질 우리는 아니다"라면서도 "그러나 저 일장기만은 너무나도 생각하게 하는 것이 많다"는 한마디를 던졌다.

욱일기는 한국 근현대사에서는 흉기나 다름없다. 일본이 위안부·강제징용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하지 않는 한, 욱일기는 한국에서 그런 이미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권은 하필이면 식민 지배 문제가 논란이 되는 이 시점에 그런 물건을 국내에 들였다.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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