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에드워드 호퍼보다 원계홍, 이유 있는 인기
서울 경희궁로 성곡미술관. 아담하고 고요한 전시장 안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그림을 음미하고 있습니다. 아, 그림이 아니라 골목길이라고 해야겠네요. 오늘도 많은 사람이 친근하고도 낯선 골목길 앞에서 기꺼이 길을 잃기 위해 그곳을 찾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 전시보다 뜻밖의 큰 감동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그 너머_원계홍(元桂泓·1923~1980) 탄생 100주년 기념전’ 얘기입니다.
그림 속 골목으로 함께 들어가 볼까요. ‘홍은동’ ‘장충동 1가 뒷골목’ ‘약수동 골목’ ‘성북동 산동네’ 등의 제목을 달고 있는 그림은 고독한 도시를 그린 호퍼의 그림보다 더 적막합니다. 사람 그림자 하나 눈에 띄지 않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춘 것 같은 풍경입니다. 실제로 화가는 주로 인적 없는 새벽에 길을 나서 그림을 그렸다지요.
원계홍이 누구냐고요. 전시 제목이 말하듯이 원계홍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화가입니다. 1978년 12월 55세에 뒤늦게 화가로 데뷔해 딱 두 번 전시를 열고, 1980년 12월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으니 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1942년 도쿄 주오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앙리 마티스의 제자였던 일본 미술가 이노쿠마 겐이치로 아래에서 그림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하죠. 전시장에서 그의 정물화와 풍경화, 그리고 꼼꼼하게 적은 작가 노트를 보면 원 화백이 얼마나 그림에 진심이었는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기하학적 구성이 돋보이는 화면에 다채롭게 펼쳐진 잿빛 색조. 군더더기를 최대한 제거하고 가장 단순화된 선과 면, 색으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한 화가의 순수한 열정이 캔버스에 그대로 배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전시의 또 다른 감동은 원 화백의 이 귀한 작품을 우리가 다시 마주할 수 있게 한 김태섭·윤영주 두 소장가의 스토리에서 나옵니다. 두 사람은 작가 지명도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그림’ 하나 보고 반해 자칫하면 흩어져 버릴 뻔했던 작품을 수십 년간 소장·보존해 왔습니다.
이번주에 전시 하나를 봐야한다면 그것은 단연 원계홍이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21일 막 내릴 예정이었으나 관람객들의 호응으로 연장돼 다음 달 4일까지 열립니다. 3월 개막 당시엔 엄두도 내지 못한 도록(圖錄)도 관람객들의 요청으로 제작 중이라고 합니다. 특정 사조나 평가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우직하게 자기 길을 걸은 화가, 그리고 사심(私心) 없이 오로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품은 두 소장가의 운명 같은 만남이 지금 한국 미술사의 새 장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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