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학교에 등장한 아랍 전통 복장, 제가 '꼰대'였네요

서부원 입력 2023. 5. 29.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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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나의 스승] '반티' 경연장이 된 고등학교 체육대회 풍경

[서부원 기자]

 흡사 '반티' 경연장 같은 고등학교 체육대회 풍경
ⓒ 서부원
 
흔한 남고 체육대회의 풍경 

남자 고등학교의 체육대회는 학급별 단체 티셔츠(반티)를 맞추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집마다 발에 치이는 게 운동복이고,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말해도 언제부턴가 반티 맞추는 게 체육대회 시즌의 '국룰'이 됐다. 체육대회가 아니라 언뜻 '반티 경연장' 같기도 하다.

반티 디자인의 십중팔구는 축구팀 유니폼이다. 대개 유럽과 남미의 국가대표팀부터 유럽 유명 축구 클럽의 유니폼까지 각양각색이다. 실제로 디자인 사용 허가를 받지 않은 '짝퉁'이다. 종일 아이들이 운동장을 활보하며 해당 클럽을 열심히 홍보해 주고 있는 꼴이다.

개중에는 해외여행 도중 샀거나 인터넷을 통해 직접 구매했다는 정품 유니폼을 입고 온 아이도 있다. 축구팀의 '이름값'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반소매와 반바지 한 세트에 20만~30만 원을 호가할 만큼 고가다. 아이들 사이에서 정품 유니폼은 해당 축구팀을 마치 가족처럼 여긴다는 '찐팬' 인증이다.

남자 고등학교에서 축구는 이미 '종교'다. '축알못(축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친구들 간의 대화에 끼기가 쉽지 않다. 유럽 각국 프로축구 리그의 막바지 순위 경쟁이 치열한 데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앞둔 요즘 같은 때엔 교실에선 온종일 축구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운동장에서 땀 흘리는 걸 싫어하는 아이들조차 '보는' 축구만큼은 대부분 즐긴다. 국가대표팀 간 축구 경기는 물론이고, 유럽 각국 프로축구 리그의 이른바 '빅 클럽' 간의 경기라면 녹화중계라도 빼놓지 않고 본다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시험 기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티 차림으로 줄 선 아이들의 모습으로만 보면, 운동장은 흡사 월드컵이나 유럽 챔피언스 리그를 치르는 경기장 같다. 한편으론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게 화사한 봄꽃들이 만개해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솔직히 체육대회가 아니면 이렇듯 활기찬 아이들의 모습을 기대하긴 힘들다.

경기 도중 고함치고 땀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그들이 입은 반티 등에 적혀있는 글귀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축구 선수의 이름을 적고 등번호도 자신이 맡은 포지션을 나타냈는데, 요즘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아이들은 반티를 도화지 삼아 온갖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아낸다. '여친 구함'이나 '수능 대박' 따위의 글귀는 이미 고루한 축에 든다. 유명 축구 선수와 자신의 이름을 교묘하게 합성하는가 하면, 자신의 재능과 특기를 홍보하기도 한다. 자신의 SNS 계정을 써넣은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반티'를 도화지 삼아 자신을 표현했다. 사진의 내용은 '너 보고 싶어'라는 고백을 재치있게 표현해놓은 것이다.
ⓒ 서부원
 
또, 자신의 장래 희망이나 다짐을 적거나 자신이 속한 동아리의 홍보 수단으로 삼는 모습도 보인다. 직접 친구를 찾아가 말하기 데면데면했던지, 등 뒤에다 사과의 문구를 새긴 아이도 있다. 여자친구의 이름을 적거나 특정 선생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심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고백하자면, 지금껏 학급 담임을 맡을 때마다 반티 제작에 반대해 왔다. 학년 초 아이들과의 첫 만남 때부터 미리 명토 박을 정도였다. 체육대회 때 말고는 입을 일이 거의 없어 쓸데없는 낭비라고 생각했고, 자칫 교실 내에 강압적이고 획일적인 문화를 확산시킬 수 있다고 봤다.

돈도 돈이지만, 한 번 입고 버릴 거라면 환경에도 해를 끼치게 될 터다. 사회나 환경 교과 수업 때, 옷 한 벌을 만드는 데도 엄청난 물과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걸 배운다. 그런데도 모든 학급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꼭 필요하지도 않은 반티를 맞춘다는 건 반교육적이라고 여겼다.

무엇보다도 소수일지언정 축구를 싫어하고 반티 살 돈이 아깝다는 아이들이 느닷없이 배제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일률적 강제 구매는 아니라고 하지만, 대다수가 반티를 입는 상황에서 선뜻 홀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울며 겨자 먹기일지언정 다수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체육대회 때 학급별 단합을 위해 맞춘 반티가 본의 아니게 차별과 배제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찜찜했던 거다. 올해엔 무기명 투표를 해서 단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반티를 맞추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아이들은 토론과 설득을 거쳐 만장일치를 봤고, 나 또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티가 불러온 뜻밖의 토론 

그런데, 올해 체육대회를 지켜보면서 반티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앞서 말한 대로 반교육적인 측면이 없진 않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는 걸 깨달아서다. 비단 반티뿐이랴. 뭐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반티 제작 여부부터 디자인 선택과 가격대에 이르기까지 아이들끼리 숱한 회의를 거쳤다. 회의 과정의 치열함과 진지함은 여느 때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평소 말수가 적은 아이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학급 단톡방에서도 다수결에 앞서 다양한 의견들이 활발히 개진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반티에 새겨진 해당 축구팀 유니폼의 디자인과 로고가 상표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지가 도마 위에 올랐다. 만약 누군가 반티를 입고 있는 모습을 사진 찍어 자신의 SNS에 탑재한다면,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지 않으냐는 거다.

어차피 '짝퉁'이라 문제 될 게 없다는 이야기부터, 처벌해야 한다면 인터넷을 통해 버젓이 판매하고 있는 업자의 책임이라는 주장까지 오갔다. 뻔히 상표권 침해인 줄 알면서도 구매하는 소비자도 문제라는 반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반티가 상표권 관련 공부의 소재가 된 셈이다.
 
 가톨릭 학교에 나타난 아랍 전통 복장. '부담스럽지 않으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꼰대스럽다'고 답했다.
ⓒ 서부원
그런가 하면, 한 학급에선 아랍 전통 의상을 갖춰 입고 나왔다. 바짓단까지 나풀거리는 흰색 긴 옷에다가 흰 천을 쓰고 머리에 검은끈(이갈)까지 두른 모양새다. 다른 반들이 죄다 축구팀 유니폼 차림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옷차림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들이 어슬렁어슬렁 운동장에 걸어들어오자 모든 이들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다가가 만져보기도 하고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등 박장대소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 아이에게 반티를 생뚱맞게 아랍 전통 의상으로 정한 이유를 물었다. 나름 진지한 질문이었건만, 그의 답변은 허무했다. "재미있잖아요." 아무리 체육대회라지만 반티의 역할이 운동을 위한 기능성에만 있지 않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는 거다.

게다가 초여름 날씨의 땡볕 아래에서 종일 있어야 한다면, 반팔 차림보다는 차라리 시원한 소재의 긴 소매가 낫다고 여겼단다. 모두에게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어서 좋고, 땡볕을 가릴 수 있어 좋으니 일석이조라고 했다. 운동복으로 사용하기엔 거추장스럽지만 나름 만족한단다.

혹시 가톨릭 학교에서 아랍 전통 의상을 입는 게 부담스럽진 않았을까. 다른 아이는 그 질문 자체가 '꼰대스럽다'고 잘라 말했다. 천으로 온몸을 감싼 건 낮 기온이 높고 건조한 아랍의 기후 조건에 기인한 것이라 배웠다면서, 옷만으로 종교를 판별하는 건 편견이라고 쏘아붙였다.

아이들은 그깟 반티 디자인 하나를 가지고 종교적인 관점을 덧씌워 해석하는 걸 황당해했다. '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이는 격이라며 비아냥거렸다. 학급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여럿 있는데,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단다. 터부는커녕 재미있겠다며 모두 맞장구쳤단다.

체육대회를 위한 반티는 아이들이 민주적 합의 절차를 경험하고 상표권에 대해 공부하며 각자 창의성을 발휘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아이들의 체력을 키우는 건 외려 덤일뿐더러, 종교적 금기에 대한 내 안의 낡은 고정관념을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 그들의 재기발랄한 모습을 통해 교육이 교실에만 있지 않다는 걸 새삼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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