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시시각각] 흰개미, 진화의 법칙

박정호 입력 2023. 5. 29. 00:59 수정 2023. 5. 29.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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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문화재 속에 숨어 있는 흰개미를 찾아내는 탐지견. 기후이변에 따른 흰개미의 습격이 우려되지만 사실 흰개미는 생태계의 청소부 역할을 한다, [중앙포토]

이번엔 흰개미였다. 꿀벌 실종사건으로 한동안 요란하더니 최근 서울 강남 주택가에 흰개미가 출현해 큰 소동이 일었다. 관계당국이 연합작전을 벌여 159마리를 박멸했다는 소식이다. 국내 유일의 흰개미 탐지견 ‘초롱이’도 활약했다.

흰개미는 목조문화재의 저승사자로 불린다. 지난해 문화재청 보고서에 따르면 국보·보물 등 국가 지정 목조문화재 362건 중 324건이, 즉 무려 89.5%가 크고 작은 피해를 보았다. 기후위기와 교역 증가에 따른 외래종의 습격도 우려된다. 강남 흰개미도 말레이시아·보르네오 등이 고향으로, 5년 전께 목재나 가구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됐다.

「 목조문화재 망치는 ‘해충’ 불명예
서로 협력하며 생태계 순환 도와
‘이념의 법칙’에 매몰된 한국정치

하지만 흰개미는 억울하다. 해충이란 딱지가 부담스럽다. 인간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고 자연계에서도 지대한 역할을 하는데 ‘악당’처럼 취급된다. 흙 속 영양물질을 분해해 식물의 성장을 돕는 생태계 순환의 숨은 일꾼인데 말이다.

흰개미는 개미란 이름과 달리 바퀴벌레 사촌이다. 생김새만 닮았을 뿐 둘은 전혀 다른 동물이다. 흰개미를 전공한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흰개미는 벌이나 개미처럼 바퀴벌레 중에서 사회성이 고도로 진화한 경우”라고 말했다. 이어 “문화재를 훼손하니까 철저한 방제가 필요하겠지만 흰개미를 혐오 곤충으로 몰아가는 건 부당하다”고 했다.

현재 확인된 흰개미는 약 3100여 종.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한 생물 중 하나다. 그중 인간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은 80여 종이다. 고생대 말기인 기원전 2억5000만 년까지 기원이 올라간다니 500만 년에 불과한 인류의 역사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다. 진화라는 거대한 물결에 비춰볼 때 인간은 흰개미 앞에서는 갓난아기쯤 될까. 보잘것없는 곤충도 함부로 재단할, 그것도 한쪽 눈으로만 판단할 일이 아니다.

개미와 흰개미는 공동사회라는 진화 과정을 밟아 왔다. 그 요체는 협력의 법칙이다. 1980년대 중반 코스타리카 열대림에서 개미의 생태를 연구한 최 교수는 각기 종이 다른 개미들도 공동의 적군 앞에선 연합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독불장군 여왕개미가 여럿 모여 군집(colony)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 다른 무리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다. 하물며 인간사는 어떻겠는가. 급박한 국제정세에도 매사 철천지원수처럼 대립하는 이 땅의 정치권은 언제쯤 진화의 큰 강에 합류할까. 틈만 나면 전 정권을 성토하고, 짬만 나면 현 정권을 비토하는 건 그 먼먼 옛날 개미들도 하지 않던 일이다. 진화란 협력과 공조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화의 정반대엔 이념이 있다. 수상엔 실패했지만 올해 세계적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장편소설 『고래』엔 이런저런 법칙이 줄지어 등장한다. 천명관 작가는 한국 현대사를 의뭉스럽게 비튼 이 우화소설에서 ‘그것은 ○○의 법칙이었다’며 관성·유전·사랑·가속도·생식·현금·관청 등 30여 법칙을 들이대는데, 그중에 이념의 법칙이 도드라진다. 예컨대 “남쪽 사람들과 북쪽 사람들은 미칠 듯한 증오에 휩싸여 서로 수백·수천 명씩 학살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감춘 채 아무나 붙잡고 상대방의 생각을 물었다. 대답할 수 있는 둘 중의 하나뿐이었기에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언제나 반반이었다”는 식이다. 작가는 이처럼 20세기 한국인을 옥죄어 온 ‘반편이 이념’을 조롱한다. 20년 전의 소설이건만 오늘 되레 더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그제 부처님오신날, 서울 조계사에 여야 지도부가 출동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참석했다. “부처님의 세상은 공동체와 이웃을 위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그 바탕에는 너와 나를 가르지 않는 ‘불이(不二)’가 있다. 지난해 8월 이후 중단된 기자회견도 검토 중이라니 이제라도 반대 진영에 대한 좀 더 열린 마음을 기대한다. 그것이 진화의 법칙이다. 부처가 깨달은 연기의 법칙, 자유의 법칙이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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