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북클럽] 쓸 거리가 없어요? 이걸 보면 달라질 겁니다

김지은 입력 2023. 5. 2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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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시인의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을 읽고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입니다. <편집자말>

[김지은 기자]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표지.
ⓒ 난다
안희연 시인이 산문집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나온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단어의 집>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이번 산문집도 기대가 됐다. 책 사는 걸 좋아하지만 오래 가지고 있는 책은 많지 않다. 다 본 책은 금세 중고서점에 팔고 이내 다른 책들로 책장을 채운다.

그런 우리 집 책장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책 중 하나가 안희연 시인의 <단어의 집>과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다. 이번에 나온 산문집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도 오래 소장하고 싶은 책일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나도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산문집은 본격적으로 독서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아도 쉽게 읽을 수 있어 좋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음식이 다 될 때까지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고 싶을 때, 지하철을 타고 길지 않은 구간을 이동할 때 난 산문집을 펼친다. 짧지만 여운이 있는 글을 만나면 식사를 하면서, 환승 구간을 걸어가면서 그 글을 곱씹는다.

안희연의 이번 산문집도 그렇게 읽었으나 다른 책들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글을 읽고 나면 그 글과 관련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는 거다. 마치 대화하는 것처럼.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뉜다. 안희연은 이 책이 기획될 당시 콘셉트를 '먹고 사고 사랑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채널예스, 안희연 시인 "먹고 사고 사랑하는 이야기"). 그래서인지 1부는 먹거리와 관련된 글, 2부는 사고 싶은 물건 또는 추억이 있는 물건과 관련된 글, 3부는 사랑에 대한 글로 채워져 있다.

살아가며 누구나 경험하는 주제라 글을 읽고 나면 '저기... 나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요' 하고 말하고 싶어 입술이 들썩들썩, 쓰고 싶어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댄다.

제일 처음 나오는 글인 '귤'에서는 어린 사촌이 점토 통에 숨겨놓았던 오래된 귤 이야기가 나온다. 귤을 숨겼다가 혼자 먹으려고 했던 마음. 아끼다가 못 먹게 되어버린 귤. 시인은 그 글 끝에 당신의 귤은 무엇이고 당신은 그 귤을 어디에 숨겼느냐고 묻는다. 겨울은 겨울의 속도로 흐르고 숨겨둔 귤은 잊히고 우리는 또 무럭무럭 나이를 먹지 않겠느냐고 써진 글의 행간 사이에서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과 마주한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운동장에 감나무가 많았다. 가을이 되면 나무마다 감이 주렁주렁 열렸는데 나와 친구들은 야간 자율학습을 하다말고 선생님들 눈을 피해 몰래 감을 따곤 했다. 그렇게 몰래 따먹던 감은 어찌나 맛있던지.

그러던 어느 날, 딴 감 중 덜 익은 감 몇 개를 친구 사물함에 넣어 놓고는 우리 모두 그 일을 잊었다. 겨울방학을 했고 해가 바뀌었다. 개학식날, 친구가 사물함을 열어보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이 감 좀 봐! 이 감들이 사물함에 있었어!"

딱딱했던 감이 홍시처럼 물러졌다. 처음엔 '썩은 거 아냐?', '너 먼저 먹어 봐', '아니야, 너부터 먹어 봐' 하고 미뤘던 친구들이 한 입씩 맛보고는 '나 더 줘.' '나도, 나도.' 하며 서로 감을 먹겠다고 난리였다. 그때 오래된 감을 발견했던 친구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감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웃었던 친구의 얼굴이 머리에 선하다.

시인은 오랫동안 숨겼던 귤이 쓸모없어진 걸 발견했지만 난 오랫동안 숨겼던 감이 더 맛있어지는 경험을 했다. 결국은 적절한 타이밍인 건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적절한 타이밍'으로 생각이 옮겨간다.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많은 이야기

시인이 쓴 산문이라 그런지 시의 느낌이 나는 산문들도 많다. 정성껏 고른 단어와 너른 생각의 폭에 감탄한다. '이 주제가 이렇게 전개된다고?' 하며 내 상상의 여지를 넓힌다. 2부의 '밤을 견디는 재료들'에는 잠옷 이야기가 나온다. 잠옷을 사려고 결심한 과정, 신중한 쇼핑 그리고 물망에 오른 두 가지 잠옷 재질에 대한 단어의 뜻과 기원을 찾아보는 이야기. 그 뜻과 기원을 토대로 펼치는 상상의 대장정.

난 시인의 상상을 힘껏 따라가며 그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넋 놓고 구경한다. '그래도 표백은 싫어요'라는 글에서는 빨래 이야기를 하다가 나를 빨고 싶다고 하다가 자신이 표백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경험을 나누다가 만약 표백을 한다면 어떤 기억이 삭제될지 가늠해본다. 내가 생각했던 글의 흐름이나 틀이 와장창 깨진다. 나도 내 생각을 틀에 가두지 말고 더 자유롭게 상상해보자고 다독인다.

가볍게 읽을 수도 여러 번 곱씹으며 깊이 있게 읽을 수도 있는 흔치 않은 책이다. 이 책의 모든 글이 독자의 삶과 맞닿을 수는 없겠지만 살면서 누구나 경험하는 주제여서 적어도 몇 편은 곱씹게 될 것이다.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곧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을 뻐끔대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 이야기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

요즘 여러 곳에서 이런저런 글쓰기 강좌들이 많이 열린다. 참여자들은 거의 항상 "글을 쓰고 싶은데 무엇에 대해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쓸 거리가 없어요"란 질문 또는 푸념을 한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 쓸 거리가 없어 난감해하는 사람이여, 더 이상 고민하지말고 이 책을 읽으라. 자신도 몰랐던 자기 안의 많은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group 》 시민기자 북클럽 : https://omn.kr/group/bookclub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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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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