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를 뒤흔든 양심고백, 삼성의 민낯을 읽다
[김성호 기자]
한국이 세계에 내놓은 빛나는 것이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게 기업이다. 한국 기업체가 생산한 자동차와 휴대폰, 선박과 먹거리가 전 세계 사람들의 선택을 받는 모습을 심심찮게 마주하는 세상이다.
한때는 값싼 노동력 말곤 내세울 게 없던 시절도 있었다. 남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내수시장에 팔아먹는 기업이 태반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를 선도하는 수출기업이 적잖이 자리잡은 현실은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오랜 이야기 만큼이나 놀랍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들라하면 십중팔구 삼성이란 이름이 나올 것이다. 한국 상장기업 가운데 시가총액이 독보적인 삼성전자를 필두로, 그룹 총 자산만 900조 원 대에 이르는 굴지의 기업이 바로 삼성그룹이다. 이병철과 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총수 지배는 한국 특유의 재벌경영의 전형이라 할 만하고, 한국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은 다른 어느 기업과도 댈 것이 아니다.
▲ 삼성을 생각한다 책 표지 |
ⓒ 사회평론 |
세계적 기업 삼성의 낯뜨거운 과거
<삼성을 생각한다>는 삼성 임원으로 법조계를 상대로 로비업무를 맡았던 김용철의 책이다. 전두환 비자금 수사 등으로 주목받은 검사 출신으로,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삼성 임원으로 재직했다. 삼성이 영입한 1세대 법조인 임원이며 김 변호사 스스로는 법조계와 상관없이 경영에 대해 배우고 싶어 삼성의 제안에 응했다고 술회한다.
책은 내부자의 시선에서 쓰여진 삼성 비위의 기록이다. 김용철은 2007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공익제보자로, 이 책은 그에 대한 배경과 내막, 전엔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삼성그룹과 비자금 수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총 4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터운 책 안에는 법조계에 대한 삼성 측 로비 창구로 일하며 느낀 자괴감부터 삼성그룹의 부적절한 경영실태에 직면해 느낀 감상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무엇보다 삼성 비자금은 이건희로부터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이뤄진 탈법과 비위에 직접적 관계가 있기에 그 의미가 크다. 그러나 사건은 이미 특검 수사와 법원 판결을 거쳐 사실상 삼성에 면죄부를 주는 방식으로 종결됐다는 점에서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삼성과 재벌에 대한 한국 법치주의의 패배의 기록으로 읽을 수도 있다고 하겠다.
동반자에서 배신자로, 그 변호사의 고백
책은 자기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수백만원 짜리 옷을 사서 한 번 걸치고는 내팽개치기도 했'던, '그들이 쥐어준 돈'으로 '사법부를 길들이는' 역할을 맡았다는 이의 내밀한 이야기다. 한때는 그들 중 하나였고, 법조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려한 것만으로 배신자라고 낙인찍혀 버려졌다는 이가 한국사회에 터뜨린 최대기업의 비자금 스캔들이 이 책의 중심을 흐른다.
폭로는 크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저자 자신 명의 계좌에 든 수십 억 원의 돈이 삼성의 차명 비자금이며, 당시 삼성이 저자뿐 아닌 다른 임원들의 명의를 통해 막대한 비자금을 국내에서 운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첫째다. 삼성 그룹이 법조계를 비롯 사회 전반에 지속적인 불법 로비를 해왔다는 사실도 수차례 언급된다. 삼성 그룹이 구조본을 통해 이건희 개인을 위한 이익집단으로 사유화돼 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이건희에서 이재용으로의 그룹 승계를 위해 부당한 수단을 동원해 그룹의 이익을 해한다는 대목 또한 빠질 수 없다.
이에 대한 결론은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 법치의 패배다. 삼성 경영권 승계며 비자금 조성과 관련한 사건은 대부분 저자와 함께 고발한 이들이 바란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국민적 기대를 모은 조준웅 특검은 재벌총수의 배임행위로 인한 이익과 천문학적 조세포탈 혐의를 모두 포착했으나 '개별적 특수성'과 '시대적 상황' 등 모호한 개념을 내세워 이건희를 구속기소하지 않고 마무리 짓는다. 시민사회는 이를 사실상의 봐주기 수사라 비난했으나 끝내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되풀이 된다
시간이 흘러 조 특검의 서른여섯 살 된 아들이 삼성전자 과장으로 입사하는 촌극이 벌어졌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솜방망이 처벌만 받은 이건희는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사면까지 받았다. 대한민국에 정의는 어디있는가 하는 자조적 목소리가 들끓었으나 변화는 없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씁쓸함을 더하는 <삼성을 생각한다>는, 그럼에도 이 시대 시민들의 필독서로서 가치가 있다. 저자 스스로 수없이 싸웠던 고정관념, 이를테면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자포자기하고 무력한 생각이 이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씻겨나가기 때문이다. 삶 가운데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원칙이 있다는 저자의 태도와, 그리하여 일어선 그를 돕는 이들의 손길, 그렇게 하나하나 증명해나간 거대 기업의 비리, 결과로 이어지진 못했으나 기록되고 공유되는 진실이 이 책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448p
다음은 인상적인 대목이다.
박연차 수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 게 삼성 비리에 대한 수사다. 사실 박연차 게이트와 삼성 비리는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비리의 규모다. 삼성 비리 쪽이 압도적으로 규모가 크다. 세상에 알려진 삼성 비리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정·관·법조계 등에 대한 불법 로비, 비자금 조성 및 탈세, 경영권 불법 승계 등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저지른 비리와 같은 종류다. -103p
골프장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김인주가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더니, 그 후배 검사에게 건네는 것을 봤다. 그 후배는 아무 말 없이 받아서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그 후배가 그렇게 쉽게 돈을 받을 줄 미처 몰랐다. 김인주에게 다가가 얼마를 줬냐고 물었더니, "삼백쯤"이라고 대답했다. 훗날 그 후배 검사는 검찰 고위직에 올랐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77p
그 무렵 삼성중공업은 조선부문 매출이 2조 원쯤 됐다. 이런 회사에서 2조 원 분식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회계 감사를 맡았던 삼일회계법인 소속 회계사들에게 돈을 엄청나게 뿌렸다. 저녁마다 룸살롱에 데려갔다. 결국 텅 빈 거제 앞바다에 건조 중인 배가 여러 척 떠 있는 것으로 처리하면서 막무가내로 회계를 조작했다. 이 과정에서 부실관계사 정상화 TF팀이 꾸려졌고, 수없이 많은 회의를 했다.
분식회계로 감춰진 비용은 어떻게든 메워 넣어야 했다. 화장실 불 끄고, 화장지 없애는 식으로 10여 년에 걸쳐 해결하기로 했다. 물론, 이보다 더 강력한 수단은 구조조정이었다. 당시 6만 명이 삼성에서 쫓겨났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당시 분식된 부분을 꽤 털어냈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이처럼 노골적인 분식회계를 알면서 용인한 회계법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본다. -3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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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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