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처럼 휜 '송전탑' 노선... "그 이유가 기막히다"
[김병기 기자]
▲ 강원 평창군 진부면 남부지역 송전탑반대 대책위가 한전이 계획한 송전선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노선 |
ⓒ 이기남 |
345kV 송전선이 활처럼 휘면서 4개 마을을 지나간다. 이에 반기를 든 주민들이 최단 거리 직선을 그어 대안으로 제시했다(위 이미지). 왜일까? 지난 10일, 진부로 향하는 KTX 안에서 이 지도를 몇 번이나 들춰봤다.
▲ 박병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 김병기 |
진부역에 마중 나온 박병춘 시민기자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분명했다.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이다. 4개 마을이 힘을 모으면 이길 수 있다는 의미이다. 대전의 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일하다 퇴직해 강원도 산골로 온 그는 자연의 통찰을 담은 '박병춘의 산골통신'(https://omn.kr/1zye0)을 <오마이뉴스>에 연재해 왔다. 이런 그가 지금은 이 지역 송전탑반대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싸움의 한복판에 있다.
이날 박 기자의 차를 타고 간 곳은 진부면 수항리 마을회관이다. 동쪽으로 두타산 자연휴양림이 마을을 병풍처럼 감쌌다. 서쪽으로는 해발 1364m의 백석산이 버티고 있다. 도로를 따라 굽이굽이 흐르는 수항계곡은 맑고 투명했다. 백석산 아래쪽, 계곡과 잇닿은 마을은 박 기자가 사는 산골마을 화의리다. 바로 위쪽에는 마평2리, 아래쪽에는 막동리가 자리 잡고 있다.
수항계곡을 따라 평화로운 4개 산골마을을 곡선으로 잇는 도로가 59번 국도이다. 아담한 계곡물이지만, 강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자연의 순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수항리 마을회관, 그 앞에 줄지어 선 현수막 글귀는 섬뜩했다.
"송전탑=발암탑, 집 위에 꽂고 못 산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송전탑 설계하라"
'박병춘의 산골통신', 이번에 그는 펜을 들지 않고 취재원을 자청했다. 송전선로 때문에 성난 동네사람들을 기자에게 소개했고,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며 온몸으로 기사를 구술했다.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 마을 전경. 한전은 우측 산 능선으로 지나가는 송전선로를 계획했다. |
ⓒ 김병기 |
박 기자와 함께 수항리 마을회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6~7명의 '마을 투사'들이 앉아 있었다. KTX 안에서 펼쳐본 사진, 지도 위에 대안 노선을 그린 반대대책위 이기남 간사도 있었다. 그는 '345kV 신평창-강릉 안인 송전선로 건설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이 사업은 강릉에코파워가 강동면 안인리 61만 8182㎡ 부지에 건설하는 2GW 규모의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시작됐다. 곧 상업운전을 개시할 1호기에 이어 2호기까지 완공되면 100여만 가구에 시간당 총 208만㎾의 전력을 보낼 수 있다. 한전은 평창군 대화리에 건설하는 신평창 변전소까지 이 전력을 공급할 송전선로를 구축하고 있다.
직선거리는 대략 60km. 노선이 확정된 강릉 구간에는 송전탑 65기 정도가 들어선다. 한전은 나머지 구간 노선을 확정해서 오는 2026년 10월까지 총 130여 기의 송전탑을 준공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런데 평창군 진부면을 경유하는 노선 선정 과정에서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힌 것이다.
▲ 이기남 강원 평창군 진부면 '남부 지역 송전탑 반대 대책 위원회' 간사 |
ⓒ 김병기 |
이기남 간사는 "국책사업이기에 크게 반대를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송전선로가 그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직선 노선으로 가면 피해지역에 8가구 정도가 살고 있고, 또 적자 타령을 하는 한전이 돈이 많이 드는 노선, 활처럼 휜 송전선로를 계획하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활처럼 휜 노선] 한전이 직선 노선을 폐기한 까닭은?
4개 마을 주민들은 '남부지역 송전탑 설치 반대 대책 위원회'(위원장 김종석)를 구성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심재국 평창군수를 2번 면담했고, 그 결과 평창군은 지난 3월 16일 한전에 건의 공문을 보냈다.
▲ 평창군은 진부면 4개 마을 주민들의 송전선로에 대한 반대 의견을 담은 건의내용을 한전에 공문으로 보냈다 |
ⓒ 평창군 |
이에 한전이 지난 4월 12일 평창군에 회신한 공문의 핵심 골자는 이것이다.
▲ 한전이 평창군에 보내온 공문 갈무리 |
ⓒ 한전 |
▲ 한전이 평창군에 보내온 건의 내용에 대한 회신 |
ⓒ 한전 |
한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과거와는 달리 송전선로 노선을 정할 때는 주민대표 3분의 2 이상이 참석한 입지선정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하고 있는데, 정선군 측 주민들이 상생협의체 참석을 거부해서 부득이하게 평창군 노선을 검토해 왔다"고 말했다.
▲ 김종석 강원 평창군 진부면 '남부 지역 송전탑 반대 대책 위원회' 위원장 |
ⓒ 김병기 |
김종석 반대대책위 위원장은 "맨날 적자 타령하는 한전이 설명회를 열었을 때 송전선로가 활처럼 휜 것에 대해 '개발업자에게 특혜를 주고 공사비를 불리려고 설계한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고 따져 물었다"면서 "우리 동네는 청정지역으로 귀촌 인구가 90%에 달하고, 양봉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송전탑이 들어선다면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간사도 "더 많은 주민들이 피해를 볼 수 있는 곡선 노선을 결정하면서 회신 공문에는 '주거지역 회피'를 위해 결정했다는 상반된 주장을 했다"면서 "송전탑을 설치할 때 여러 조건 중 그 첫 번째 항이 집단주거 지역을 피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 평창군 진부면 4개 마을 주민 200여명은 지난 4월 2일 수항리 마을회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송전선로 변경과 상생협의체 해체를 촉구했다. |
ⓒ 송전탑반대대책위 |
4개 마을 주민 200여 명은 지난 4월 2일 수항리 마을회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송전선로 변경과 상생협의체 해체를 촉구했다. 이들은 특히 "상생 발전 협의체 구성원들은 회의가 진행될 때마다 각각 40만 원, 1차부터 6차까지 개인당 240만 원의 수당을 받고 회의에 참석했다"면서 "선물 꾸러미까지 챙겼으니 국고 손실 면에서 국정조사감"이라고 성토했다.
이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지난 4월 24일, 상생발전협의체는 진부문화센터에서 가진 임시회에서 해체 안건을 상정해 참석위원 10명 만장일치로 '협의체 해체'를 결정했다.
김남현 상생협의체 위원장(진부면 번영회장)은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주민들이 반대해서 해체를 의결했다"고 밝혔다. 또 상생협의체 위원으로 참석했던 심현정 평창군의회 의장도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을 주려고 참여했던 것인데, 주민들로부터 '한전과 결탁했다'는 의심까지 샀다"면서 "주민들이 해체를 요구하기에 이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전 측은 이날 상생협의체 해체 결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전은 지난 5월 9일 위원들에게 보낸 공문을 통해 "과반 이상이 참석해야 회의가 성립하는 데 10명의 위원만 참석했기에 회의 결과는 무효"라고 밝혔다.
한전의 한 관계자는 "협의체 운영 규범에 따르면 과반수 이상이 참석해야 회의가 성립되고, 규범에는 없지만 해체 결정은 더 엄중하기에 별도의 회의 성원 등을 충족해야 되는 것 아니냐"면서 "사실상 무효라고 본다"고 말했다.
향후 직선화 노선에 해당하는 정선군 마을과 만나서 협의할 예정이고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겠지만, 이들과의 만남에서 의견 접근이 안 된다면 6차례 회의까지 한 진부면에 다시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에 대해 평창군의 한 관계자는 "군의 입장도 한전에 보낸 공문 내용처럼 주민들의 입장과 같다"면서 "한전 측이 정족수 미달을 문제 삼고 있지만, 주민들의 반대 입장이 명확하기에 다시 회의가 열려도 주민 입장에 반하는 결정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 강원 평창군 진부면 막동계곡 |
ⓒ 김병기 |
▲ 송전탑반대대책위 막동리 위원장인 문소원 씨 |
ⓒ 김병기 |
"이 좁은 계곡의 능선 위로 송전탑 16개를 세우겠답니다."
송전탑반대대책위 막동리 위원장인 문소원씨는 분통을 터트렸다. 문씨는 마을과는 좀 떨어진 산 능선에서 한적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전의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그의 집과 송전탑의 이격 거리는 대략 430여m.
그는 "방안에서 창문을 내다보면 50m 높이의 송전탑 다리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다 보이고, 나머지 2기도 방안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요즘도 분한 마음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씨의 안내를 받아 박 기자와 함께 찾아간 막동계곡에선 물소리가 자자했다. 계곡을 따라 좁은 협곡으로 난 도로 양옆으로 초록의 잎들이 무성하게 뻗어 올라가 하늘을 가렸다. 길 양옆으로 군데군데 드러나는 주택들. 그야말로 산골마을이다. 계곡 초입에서 1km 정도 올라 펜션 3채가 서 있는 앞마당에 도착했다. 막동리 부녀회장인 차성자씨의 집이다.
▲ 강원도 평창 진부면 막동리 계곡. 한전은 우측 산 능선에 송전탑을 건설할 계획을 갖고 있다. |
ⓒ 김병기 |
[지역이기주의?] 절망의 벽을 넘는 곡선 위의 사람들
▲ ‘박병춘의 산골통신’을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박병춘 시민기자(10만인클럽 회원) |
ⓒ 김병기 |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방 안 가득 들어오는 생명의 향기, 3대가 복을 지어야 누릴 수 있는 기쁨이죠.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업 기술을 배우고 있지만, 틈틈이 카메라를 들고 야생화 찍기에 빠져있었죠. 특히 아주 작은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취하려면 제가 더 낮아져야 합니다.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카메라로 야생화를 담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송전탑과의 싸움에 나선 이유가 다 들어있었다. 소소한 일상을 지키려는 이들의 싸움을 '지역 이기주의'로 일축할 수 있을까? 대도시에서 쓰는 전기 생산의 희생양이었던 핵발전소, 화력발전소 주변의 주민들에게도 적용됐던 프레임이다. 합당하고 절박한 요구인데도, 변방에 있다는 이유 등으로 이들의 입을 틀어막는 데 이 용어가 동원되는 경우를 보아왔기 때문에 드는 의문이다.
박 기자는 "우리들이 수도권으로 보내는 전기를 막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송전선로를 직선화하면 주민 피해도 적고 국가 예산도 줄일 수 있다"면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을 놔두고 왜 한전이 거꾸로 돌아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했다.
▲ [이 사람, 10만인] 성난 강원도 산골마을 사람들... 박병춘 시민기자 인터뷰 두 점을 잇는 게 선이다. 직선이 아닌 구불구불 곡선을 그으면 시간과 비용이 더 든다. 적자에 허덕이는 한국전력공사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그으려는 신평창-강릉안인화력발전소 구간의 송전탑 노선 이야기다. 345KV 송전선이 활처럼 휘면서 4개 마을을 지나간다. 왜일까? ⓒ 김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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