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먹고살기] 천천히 사는 법 터득하는 지름길

2023. 5. 27.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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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준 작가


“워~~~, 작가형 머시따아~”

내가 서울시민대학에서 강의하는 사진을 카카오톡 메신저 창에 띄우며 함께 보내온 옛 직장 동료의 메시지다. 인터넷으로 우연히 내 사진을 목격한 뒤 그걸 캡처해 보낸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맞춤법과 비속어 사용 등에 일단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무려 이십여년 만에 연락받은 것이니까. 신입사원 시절 자신과 한 팀이었던 카피라이터 선배가 글쓰기 강사로 변신해 이제는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강연하는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다. 이어 전화를 걸어온 그는 지금 서울 성수동에서 작은 광고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근황을 전하고는 서둘러 끊었다.

몇 권의 책을 낸 뒤 광고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옛 직장 동료들을 만나면 자주 듣는 소리가 “나는 당신이 쓸데없는 농담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런 재주를 가지고 있었네?”라는 반응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나는 지금도 쓸데없는 소리를 매일 하고 돌아다니는데. 아무래도 책을 내고 작가가 되니 예전보다는 뭔가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모양이다. 왜 그럴까. 그러니까 그때는 왜 그런 이미지로 살았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는 내가 너무 ‘바빴다’.

어떤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광고회사야말로 바쁜 회사를 뽑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게 틀림없다. 광고 업무 특성상 늘 급하게 기획되게 마련이고 시안 제시일이나 온에어 시점 역시 ‘에이삽’(ASAP:As soon as Possible)을 외친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게 다 단편적이다. 조금 생각하다가 안 되면 원점으로 돌아가 본질부터 다시 생각하는 ‘수평적 사고’는 내가 일했던 분야가 광고 커뮤니케이션이기에 배울 수 있었던 훌륭한 생각법이지만 반면에 빠르게 반복되는 그런 사고 패턴은 경박함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는 기업PR과 말장난으로 가득한 과자 광고 아이디어를 동시에 낼 수 있는 건 그런 ‘치고 빠지는’ 생각법에 익숙해진 몸 덕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광고 카피는 물론 내가 쓰는 다른 글도 다 짧고 단편적이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때까지 인생이나 사람에 대한 깊은 글은 전혀 쓰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카피라이터로 성공하기보다는 작가가 되는 게 최종 목표였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가 한 달간 원고를 쓰면서 비로소 ‘천천히’ 쓰는 법을 몸에 새길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천천히 곶자왈을 산책하고 천천히 혼자 밥을 지어 먹으며 생애 처음인 듯 천천히 책을 읽고 천천히 글을 썼다. 그렇게 해서 쓴 첫 책은 무명임에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

“‘천천히’라는 말은 ‘빨리빨리’의 반대말이 아니다. 무언가 빨리 이루려면 천천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봉우리에 빨리 오르려면 천천히 올라야 하고 두꺼운 책을 빨리 읽으려면 천천히 읽어야 한다. 세 번 생각하라는 말은 천천히 생각하라는 뜻이고 돌아가라는 말 역시 천천히 가라는 뜻이다. 생각을 천천히 하면 시곗바늘도 천천히 돌고 생각을 빨리하면 시곗바늘도 빨리 돈다. 빨리 걸으면 더 멀어지고 천천히 걸으면 어느새 도착이다. 실제로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지름길이 빠른 길이 아니라 천천히 걸었던 길이 빠른 길이었다.”

위에 인용한 문단은 소설가 김탁환 선생이 마음이 조급해질 때마다 찾아 읽는다며 지난 1월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렸던 작사가 한돌의 글이다. 읽어볼수록 맞는 말인데 심리기획자 이명수 선생은 거기에 “세상에서 빨라도 되는 건 앰뷸런스뿐”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탁월한 소설가의 인용에 통찰의 명수다운 댓글이다.

시간이 없이 사는 건 우리만이 아니다.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들어간 존 버거도 ‘행운아’라는 책에서 ‘시간이 없어 책은 물론 영화나 드라마도 못 보고 산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천천히 사는 방법을 빠르게 터득하는 지름길을 알려 주겠다.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쓰면 글을 쓰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자신을 들여다볼 수가 있다. 이건 내가 글쓰기 강사라 하는 소리가 아니고…. 아, 칼럼 쓸 때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끝을 내면 편집자한테 야단을 맞을 텐데. 그렇다고 천천히 다시 쓸 수도 없다. 이건 이미 하루만 늦춰 달라고 사정을 해서 수요일에 쓰는 원고이기 때문이다. 역시 ‘천천히’ 사는 건 힘들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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