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드라마 ‘아줌마’에서 차정숙까지
얼떨결에 임신이 되면서 결혼했다. 가부장 이데올로기 속에서 ‘현모양처’의 길을 걷게 된 여자는 가족 뒷바라지와 온갖 집안일을 도맡으며 남편의 권위에 눌려 산다. 그사이 대학 교수까지 된 남자는 첫사랑과 바람이 났고, 여자는 더 이상의 희생과 인내를 거부하며 주체적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 나선다. 홀로서기를 하는 여자에게 미혼의 연하 훈남이 보내는 지지와 응원은 큰 힘이 된다.
매주 자체 최고 시청률 기록을 경신 중인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 얘기가 아니다. 2000∼2001년 MBC 월화드라마로 방송된 ‘아줌마’의 줄거리다. 리메이크도 아닌데 ‘닥터 차정숙’과 ‘아줌마’는 놀랍도록 닮았다. ‘아줌마’도 당시 30%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 오삼숙(원미경)의 찌질한 남편 장진구(강석우)를 가리킨 “이 장진구 같은 놈”이 유행어가 됐을 정도다.
드라마는 현실의 허구적 재연을 통해 그 사회의 가치 체계와 대중의 욕망을 드러낸다. 드라마 전문가조차 “이렇게 낡고 낯익은 코드가 먹히는 것을 보고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다”(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고 털어놨을 만큼 ‘닥터 차정숙’의 설정은 고전적이다. 하지만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가사와 양육의 가치를 폄훼당해 온 전업주부의 인생역전 자아 찾기는 여전히 시청자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현재진행형 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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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 전 고졸 오삼숙의 자아 찾기
알파걸→경단녀 차정숙과 닮은꼴
변화 더딘 가부장적 현실 드러나
」
드라마 ‘아줌마’에서 ‘닥터 차정숙’까지 사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달라진 점은 고졸 오삼숙이 의사 면허 소지자 차정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닥터 차정숙’의 동시대성은 학창 시절 남학생에게 뒤지지 않고 성장한 ‘알파걸’이 결혼 후 일·가정 양립에 실패하고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되는 현실을 포착한 데 있다. 의대 광풍 시대, 커리어의 정점이라 할 법한 의사 차정숙 역시 어린 아들의 사고를 계기로 레지던트 과정을 포기했다.
엄마에게 육아의 책임을 떠맡긴 가부장 문화권 국가들에서 ‘닥터 차정숙’의 인기가 높은 것도 그런 공감대 때문이다. 21일 플릭스패트롤이 공개한 넷플릭스 TV 시리즈 순위에 따르면, 홍콩·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대만·베트남 등에서 ‘닥터 차정숙’이 1위를 차지했다.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지난 17일 ‘닥터 차정숙’에 대해 “가부장적 규범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현대사회의 렌즈를 통해 아내와 어머니라는 전통적 성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차정숙의 여정을 따라간다”면서 “꿈을 찾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담긴 가슴 따뜻한 이야기”라고 평했다.
페미니즘 콘텐트의 효시로 꼽히는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마지막 장면에선 주인공 노라의 ‘의무’에 대한 부부의 대화가 펼쳐진다. 집을 나가겠다는 노라에게 남편 헬메르는 “당신은 아내이자 엄마”라며 “가장 신성한 의무를 이렇게 회피하냐”고 묻는다. 그에 대한 노라의 답은 이랬다. “성스러운 다른 의무가 있다.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의무다.”
희곡 『인형의 집』이 출판되고 초연한 때는 1879년, 무려 144년 전이다. 하지만 여성의 역할을 모성으로 옭아매려 하는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는 현재도 유효하다. ‘닥터 차정숙’도 이를 세밀하게 짚고 있다. 20년 만에 용기를 내 레지던트에 도전한 차정숙이 또다시 중도 포기를 결정했을 때 그 이유는 고3 딸의 입시 뒷바라지 때문이었다.
현재 국회에는 ‘경력 단절 여성’이란 용어를 ‘경력 보유 여성’으로 바꾸자는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지자체마다 앞다퉈 이들의 재취업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막상 관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구인 공고는 간병·육아·가사 등 돌봄노동에 집중돼 있다. 이렇듯 변화의 속도는 느리고, 여성이 출산·육아의 크레바스를 넘어 자아실현의 꿈을 지키기는 여전히 힘들다. 자구책으로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하는 사례만 늘었다. 단절이든, 보유든 경력 공백 자체를 막는 것이 절박하다. ‘닥터 차정숙’ 돌풍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글 = 이지영 논설위원 그림 = 안은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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