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D 위험 알면서 공조 수사 손 놓은 韓
7만2514명.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공개한 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로 피해를 본 투자자 숫자다. 피해액은 7730억원. 대주주와 기관 투자자 손실까지 반영하면 총 손해 규모는 8조977억원(5월 8일 기준)이다. 이번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이들은 8개 기업에 투자한 일반 투자자다. 그런데도 일부 연예인이나 저명인사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정작 근본적으로 짚어야 할 ‘금융당국의 책임’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지적이 적잖다. 금융당국은 왜 이번 사태를 막지 못했을까?
근본적 원인은 ‘칸막이식 운영’
금융당국은 CFD 시장 과열 위험성을 이미 인지한 바 있다. 금감원은 지난해 5월 발간한 ‘2022년 자본 시장 위험 분석 보고서’를 통해 “증권사의 공격적인 영업으로 CFD 시장 과열 우려가 있고 주가 변동성 확대 시 CFD 거래의 레버리지 효과 등으로 투자자 손실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개인 전문 투자자 요건 완화에 대해서는 불완전판매로 투자자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같은 내용의 보고서는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세 차례나 나왔다. 2020년 11월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도 “CFD를 이용한 불공정거래를 집중 심리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보도자료를 낸 바 있다.
하지만 정작 금융당국은 2019년 11월 20일 ‘금융 투자업 규정 개정’에 나서며 CFD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개인 전문 투자자의 진입 요건을 금융 투자 계좌 잔고 5억원에서 5000만원, 총자산 10억원 이상에서 5억원(거주 주택 제외) 이상으로 대폭 낮췄다. 흥미로운 점은 금융당국이 CFD 규제를 완화한 때와 폭락한 8개 종목 주가 조작이 시작된 시기가 2020년경으로 비슷하다는 것. 금융소비자연맹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사전에 제도 개선에 나섰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금융당국의 잘못된 대처가 투자자 피해를 양산했다”고 강조했다.
금융당국이 사전에 주가 조작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다.
주가 조작 발견 과정은 크게 2가지다. 한국거래소가 거래 데이터를 바탕으로 적발하거나 금감원이 자체 인지하는 경우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어느 장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매도 폭탄이 터지기 전인 지난 4월 초, 금융위가 외부로부터 제보받고 나서야 이번 사건이 세상에 드러났다. 지난해 말부터 ‘작전 세력설’이 시장에 등장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정황이 있어 금융당국의 선제적 대처가 더욱 아쉽다는 평가가 많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민원이나 첩보, 제보가 워낙 많아 사전적으로 적발하는 데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서 “이번 사건을 통해 감시 기능을 더 고도화하는 등 제도 개선 작업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금융당국 각 주체들의 ‘칸막이식 운영’이 이번 사태를 초래한 근본적인 문제라고 꼬집는다. 앞서 금융당국이 CFD 문제점을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협업으로 제도 보완에 적극 나섰다면 SG 사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판단한다.
그나마 2021년 4월, ‘미국 아케고스 사태’ 이후 CFD의 최소 증거금률을 기존 10%에서 40%로 상향 조정해 더 큰 손해를 막은 것이 금감원과 금융위가 합의점을 이룬 유일한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주가 조작 제재는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기도 한데, 금융위와 금감원이 칸막이처럼 협업이 안 된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며 “합동 수사 TF가 생기기 전에 원래부터 그런 수사 구조가 존재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선진국 수준의 제도 개선 절실
전문가 “양형 기준 높여야”
주가 조작 수법은 더 치밀해지고 교묘해진다. 최근에는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사진을 SNS에 올린 뒤 2차전지 추천 종목을 소개하는 ‘박현주 리딩방’까지 등장할 정도다. 현행 규정·구조상 유일한 선택지가 사실상 ‘사후 대응’이라 금융당국 고심도 커졌다. 특히 카카오톡 오픈채팅에서 ‘주식’을 검색하면 수많은 방이 나오는데, 이를 감시할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난제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불법 리딩방 난립을 막기 위해 유사 투자 자문업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다. 현재는 누구든 당국에 신고만 하면 유사 투자 자문업자가 될 수 있어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유사 투자 자문업이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라 자본금이나 일정 인원 요건만 갖추면 설립할 수 있다”며 “정부가 유사 투자 자문업 요건을 강화해야 하고, 투자 윤리 교육 수준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당국 권한을 해외 선진국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지적도 새겨들어야 한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증권 규제기관으로서 불공정거래에 대한 조사, 제재, 고발 권한을 모두 갖는다. 영국 금융감독청(FSA)은 시장 남용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법적 조사권과 강력한 집행 권한과 광범위한 징계권을 행사한다. 프랑스 역시 금융시장청(AMF)이 금융 시장 감독과 불공정거래에 대한 조사·제재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과 영국처럼 시장 자율성을 높이면서도 잘못했을 때는 엄중 제재하는 쪽으로 자본 시장 원칙을 적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의 주요인으로 지목된 CFD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CFD 판매로 수수료뿐 아니라 레버리지에 따른 이자도 챙길 수 있어 짭짤한 상품으로 꼽힌다.
이효섭 선임연구위원은 “CFD는 사적 계약에 기반을 둔 장외파생상품이라 이걸 없앤다고 해도 새로운 형태의 장외파생상품으로 쏠림이 커져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장외파생상품의 거래 투명성을 강화하는 등 시장이 혼란스럽지 않게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나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외국인 등으로 표시돼 시장을 오인하게 만드는 CFD는 폐지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주가 조작 등 경제사범에 대한 처벌 강화가 가장 실효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미국 엔론 사태가 대표적이다. 엔론 사태는 2001년 미국 에너지 회사였던 엔론이 1조4000억원 규모 분식회계를 저지른 사실이 밝혀지며 회사 자체가 파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엔론 최고경영자였던 제프 스킬링은 징역 24년 4개월을 선고받았다. 금융위기 당시 최악의 주식 폰지 사기의 주범이었던 버나드 메이도프는 징역 150년형을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 이처럼 높은 형량이 나오는 것은 유기징역의 상한이 없고, 개별 범죄마다 형을 합산해 부과하는 ‘병과주의’를 채택하고 있어서다. 반면, 우리나라 처벌은 매우 약하다. 2007년에 주가 조작 사태로 시장을 떠들썩하게 했던 루보 사태만 봐도, 당시 주가 조작 주범이었던 김 모 씨에게는 징역 3년 6개월에 벌금 10억원이 선고됐다. 기획자는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 법은 병과주의가 아니더라도 이미 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지만, 양형 기준이 턱없이 낮은 것이 문제”라며 “화이트칼라 범죄는 범죄 수익을 박탈했을 때, 진압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범죄 수익 은닉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주가 조작 사건에 대한 제재나 양형 기준을 글로벌 수준으로 상향해 ‘재산 잘 숨기고 몇 년 살다 나오면 된다’는 생각을 못 갖게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10호 (2023.05.24~2023.05.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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