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춘향 가고 새 춘향 온다? 춘향 영정 수난사

이완우 2023. 5. 2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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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제93회 춘향제... 최초 춘향영정 두고 16세 춘향 초상화로 춘향영정을 세우겠다니

[이완우 기자]

21일 전북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광한루 정원의 아침은 왕버들 나무의 푸른 생기로 가득하다. 오작교 부근의 연못에는 잉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조선시대 남원부 관아의 누각이었던 광한루는 판소리 춘향가나 고전소설 춘향전의 무대로 널리 알려졌다.

시대 변화를 열망했던 춘향가
 
 광한루 누각
ⓒ 이완우
조선시대 초기 성곽 도시였던 남원성의 남문 밖 요천 냇가에 광한루 누각을 조성했다. 광한루는 달 속에 있다는 전설상의 누각인 광한전을 지상의 인간 세상에 구현한 것이다. 정원에 연못을 파서 요천 냇물을 끌어들이고, 오작교를 놓아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가 광한루에 머무르며 춘향전의 토양이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신분제 사회가 동요하고 평민들의 경제력 향상으로 평민 의식이 성장하면서 평민 문학 요소가 강한 판소리 춘향가가 광한루와 오작교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판소리 춘향가는 춘향의 이 도령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탐관오리인 변 학도의 불의에 대한 춘향의 저항, 암행어사가 된 이 도령의 금의환향과 춘향의 행복한 결말로 흥미롭고 가치 있는 내용이 풍부하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시대에 춘향가와 춘향전의 내용은 시대 변화의 열망을 담은 용광로 역할을 하였다. 구비문학인 판소리가 고전 소설로 기록화 되면서 춘향가와 춘향전은 우리나라 판소리와 고전 소설의 으뜸이 되었다. 춘향은 일편단심이며 불의에 저항이며 신분 타파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아이콘이었다. 소리꾼들의 소리 마당이나 조선 시대 후기 전기수들이 책을 읽어주는 책 마당에서 제일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광한루 오작교 자라석 방장정
ⓒ 이완우
일제강점기에 춘향전은 조선 민족혼의 표상이었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의 중심 공간인 광한루 지우기에 집중한다. 광한루는 1902년에 남원 병대청(경찰서)을 설치한다. 1909년 11월 1일에는 광한루에 광주지방재판소 남원구재판소가 설치되었다.

1928년 광한루 재판소가 법원 건물 신축으로 이전하자 남원 권번(일제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을 두었던 조합)이 중심 역할을 하여 1929년에 춘향사당 건립운동을 시작하였고 1931년에는 춘향사당까지 건립하고 제1회 춘향제를 개최하였다. 1931년은 전주와 남원 간에 철도가 준공되어 증기기관차가 달리기 시작한 해다. 이때 일제는 만주사변 전쟁을 도발하고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를 강화하는 격동의 시대였다.

남원에는 1927년에 신간회가 창립되었고, 신간회는 1929년 대흉년에 기민 구호활동을 남원 권번과 함께 하였다. 남원 권번은 남원의 독립운동 단체와 춘향사당 건립운동을 함께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으로 춘향사당 건립 운동을 남원 권번의 최봉선을 중심으로 뜻있는 분들이 제의하고 건립기금을 마련하였다. 진주 서울 등 유명 권번에서 모금이 활발하였다. 1931년 단오(양력 6월 20일)에 광한루 옆에 춘향사당을 건립하였다.
 
 광한루 정원
ⓒ 이완우
 
1919년 독립 만세 운동에 전국의 여러 권번에서 많은 기생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남원 권번은 일본 헌병이 불러도 응대하지 않았다고 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는 통로를 열었다. 남원 권번은 일본어 교습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경우로서 철저한 항일의식을 엿볼 수 있다.

춘향사당을 건립할 때 남원 권번을 중심으로 평양, 한성, 진주, 부산 등 전국의 권번에서 성금을 내었고, 1931년에 1회 춘향제는 전국에서 100여 명의 기생들이 모여서 춘향제 제사를 지내고 판소리 경연대회를 열었다. 춘향제는 사실상 독립운동이었으며 항일 의지를 발현한 제향 중심의 축제였다.

남원 권번 예기 최봉선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탄압을 뚫고 춘향영정을 제작하고 춘향사당에 봉안하였고 기생들이 제관이 되어 춘향제향을 지냈다. 이 최초의 춘향영정에 춘향은 어사 부인의 모습으로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옥지환을 손가락에 끼고 있다.
 
 최초 춘향영정, 30대 중반의 어사 부인 모습
ⓒ 남원역사연구회 21.12.15 발표 자료
춘향사당 제향 후에는 광한루 누각에 올라가 전국 예기들의 판소리 경연대회를 열었다. 제1회 춘향제부터 수만 명의 인파가 전국에서 몰려왔다. 일제가 점점 탄압을 강화하자 제8회 춘향제부터는 새벽에 제향만 조용히 지냈다.

1930년대 일제는 우리나라의 얼과 문화의 결정인 춘향전을 하루카로 일본화하여 식민지 문학을 만들었다. 1931년 제1회 춘향제의 춘향영정은 태극 문양으로 옷의 색깔을 입혀 민족의 혼과 얼을 살렸다. 그러나 1939년 제9회 춘향제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 화가 김은호의 춘향 그림을 들여와 일제의 조선 민족 말살 정책을 시도한다.

이렇게 그려진 가부키 춘향 그림은 1939년 제9회 춘향제에 일본 신사 의식인 입혼식을 거행하며 춘향사당을 차지한다. 일제는 춘향사당과 최초 춘향영정의 민족혼을 짓밟고 가부키 춘향 그림을 봉안하여 조선 민족혼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1931년 제1회 춘향제의 주제인 '단심'은 일편단심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이다. 1939년의 춘향사당의 '단심'은 일본에 충성하는 내선일체를 위한 강요된 단심이었다. 1939년부터는 춘향영정과 친일 화가의 춘향 그림이 함께 나란히 있게 되었다.
 
 친일 춘향 그림, 16세 일본 하루카 미인도 모습
ⓒ 남원역사연구회 21.12.15 발표 자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최봉선은 최초 춘향영정을 머리에 이고 광한루 앞의 요천수를 건너 지리산 아래 주천면으로 피난한다. 이때 그녀는 자기의 가산은 송두리째 남겨두고 한밤중에 최초 춘향 영정만 모시고 피난했다. 춘향사당에 남겨진 친일화가의 춘향 그림은 누구도 쳐다보지 않아 훼손되고 행방불명된다.

한국전쟁 이후 기생 최봉선은 최초 춘향영정을 춘향사당에 다시 봉안하고 춘향제를 올렸다. 이때부터 1961년 제31회 춘향제까지는 최초 춘향영정의 평화로운 시대였다. 1960년에 친일 화가 김은호는 없어진 춘향 그림을 예전과 같이 친일 색채로 똑같이 다시 그렸다.

이 친일 화가의 춘향그림은 1961년 5·16 군사 쿠테타 이후 내각에 의해 춘향사당에 다시 놓이게 되고 외국 관광객에게 춘향을 예쁜 것으로 보여야 한다며 최초 춘향영정을 치우라고 하였다. 최초 춘향영정은 1962년에 밀려나게 되어 뒷방에 보관되며 세상의 기억에서 잊혔다.

2020년 친일 화가 김은호가 그린 춘향 그림은 정부의 일제잔재청산 목록에 포함되어 춘향사당에서 시민단체의 요구에 의해 어렵게 내려졌다. 이때 최초 춘향영정이 남원시 향토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를 접한 시민단체는 남원시 향토박물관 수장고에서 최초 춘향영정을 확인하였다.
 
 춘향사당 팔작지붕
ⓒ 이완우
최초의 춘향영정이 세상에 잊힌 채 60년 동안 남원시 향토박물관에서 건재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감동이었다. 오랜 풍파와 험난한 세월을 견딘 우리의 현대사에서 민족혼의 상징이었던 최초 춘향영정은 이렇게 굳건히 살아있었다.

시민단체에서는 이 최초 춘향영정을 다시 봉안하자고 제안하였으며 남원시도 그렇게 하겠다며 추진했었다. 그간 최초 춘향영정의 작가는 진주 출신의 강주수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강주수는 춘향영정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이때문에 작가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은 최초 춘향영정을 봉안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작가가 검증된 새 작품을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따라 남원시와 남원문화원은 올해 춘향제 전까지 새로 그린 16세 춘향 초상화로 춘향영정을 세우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작가를 선정, 새로운 춘향영정 제작을 진행해 왔다. 남원시와 남원문화원은 제93회 춘향제가 개막되는 오는 25일 이전에 새로운 춘향영정을 봉안할 계획이다.

춘향 영정을 되살려야 하는 이유
 
 춘향사당
ⓒ 이완우
한편 최초춘향영정복원시민연대(아래 시민연대)는 22일 오전, 남원 광한루 정문에서 어사 부인 모습의 최초 춘향영정을 봉안해야 한다며, 16세 춘향 초상화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시민연대 대표 강경식씨는 21일 전화 인터뷰에서 이 같이 말했다.

"예쁜 춘향만 고집하는 것은 남성 중심의 사고이며 꽃 노리개 춘향, 억지 춘향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최초의 춘향 영정에는 남정네들의 꽃 노리개였던 천민인 기녀들이 반상의 차별, 남녀의 차별, 권력에서의 차별을 극복해 낸 춘향의 정신과 항일 독립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나이나 미모가 문제가 아니라 정승 부인도 여염집 아낙과 같다는 정신까지 담겨 있는 것이 최초의 춘향 영정이에요. 미성년자인 16세 춘향 초상화를 춘향사당에 모시고 제93회 춘향제 제향을 지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춘향사당의 주인인 최초 춘향영정은 1931년부터 30년 동안 봉안되어 있다가 1962년부터 60년 동안 향토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니 수난의 현대사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광한루를 배경으로 한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에 위치한 최초 춘향영정이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안전하게 보존되어야 하겠다.
 
 춘향사당 입구
ⓒ 이완우
21일 이른 아침 광한루 정원의 동편에 자리한 춘향사당은 정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제93회 춘향제가 25일 개막되니 곧 춘향사당의 문이 열리고 새로 그린 춘향 초상화가 봉안될 것이다. 이 춘향사당의 진정한 주인인 최초 춘향영정이 떳떳하게 돌아와 다시 봉안될 날은 언제일까? 춘향사당 건물은 팔작지붕에 정면 3간 측면 2간의 주심포 양식으로 단아하며 사당 뒤편의 대나무 숲은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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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 강경식, 대한민국 최초의 근현대 지역 축제 춘향제 연구, 남원역사연구회, 202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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