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자랑스러운 거지다” 과시 절약의 시대 [스페셜리포트]

반진욱 매경이코노미 기자(halfnuk@mk.co.kr) 2023. 5. 2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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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 A씨는 최근 한 ‘카톡방’을 활발히 사용한다. 하루에도 수천 개의 메시지가 오가는 카카오톡 방 이름은 ‘냅다 거지방’. A씨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20대가 모여 그날 사용한 돈 액수를 올리고 평가받는 곳이다.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돈을 썼는지 올리면 다른 사람들이 ‘잘 썼다’ ‘낭비다’ 등 의견을 올린다. A씨가 ‘거지방’에 가입한 이유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다. 고물가로 주머니 사정이 곤궁해지자, 쓰는 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방에 들어갔다. 돈을 쓰기 전에 미리 허락을 받기도 한다. 최근에는 “제가 좋아하는 여성에게 커피를 사야 할까요”라고 질문을 올렸다. 대화방 참가자들로부터 “여성이 평소에 커피를 사준 적이 있다면 커피를 사도 괜찮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허락을 받고 나서야 A씨는 여성에게 커피를 사서 전달했다.

일러스트: 정윤정 기자
플렉스(FLEX).

코로나19 유행 이전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단어였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과시 소비’ 정도로 풀이된다. 돈을 아끼고 모으는 대신 자기만족을 위해 과감히 소비한다는 뜻이다. 월급을 한 번에 털어 명품을 사거나 고급 호텔·식당에서 돈을 쓰는 게 대표적인 예다. 한꺼번에 많은 돈을 쓰는 과정을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에 게시해 남에게 자랑하는 게 플렉스 소비의 특징이었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중요시하던 젊은 세대에게 플렉스 소비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유통업계를 비롯한 기업들은 플렉스 트렌드에 맞춰 상품을 연달아 내놓기도 했다.

오랫동안 유행으로 굳혀질 것 같던 청년 세대 사이의 ‘플렉스 열풍’은 4년 만에 고꾸라졌다. 코로나19 유행 종료 이후 경기가 침체되고 물가가 급등하면서 돈을 과시하듯이 쓰는 유행이 사라졌다. 플렉스의 빈틈을 채운 것은 다름 아닌 ‘절약’이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돈을 많이 쓰는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닌 ‘얼마나 아껴 쓰는지’를 과시하는 게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매일매일 사용하는 돈의 액수를 남들과 공유하는 ‘거지방’ 숫자가 500여개가 넘는다. 소비 없이 하루를 보낸 뒤 인증하는 ‘무지출 챌린지’도 인기를 끈다. 바야흐로 자신의 가난과 절약을 자랑하는 ‘과시 절약’의 시대다.

오픈카톡방에 500개가 넘는 거지방

‘무지출 챌린지’는 게시물 1만개 훌쩍

과시 절약은 크게 2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절약을 주제로 타인과 대화하며 즐기는 ‘대화형’과 자신의 절약을 남에게 보여주는 ‘인증형’으로 나뉜다. 대화형은 카카오톡의 ‘거지방’이 주 무대다. 인증형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비롯한 SNS를 주로 사용한다.

무지출 챌린지는 하루에 돈을 쓰지 않고 보냈음을 SNS에 인증하는 것을 말한다. 인스타그램에 무지출과 무지출 챌린지를 태그한 글은 1만여건에 달한다. (인스타그램 화면 갈무리)
대화형 과시 절약은 카카오톡 공개대화방인 ‘오픈채팅방’에서 이뤄진다. 2023년 들어 거지방은 오픈채팅방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로 떠올랐다. 한 방당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1000명이 넘게 모여 자신의 소비 습관을 공유한다. 거지방은 지출·투자·목표 등을 공유하며 ‘거지처럼 아껴 쓰자’는 취지로 운영된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타인의 소비 행위를 적극 평가한다. 합리적인 소비라면 ‘좋다’는 칭찬과 함께 돈을 써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다. 반면 불필요하게 돈을 쓰거나, 과하게 돈을 쓰면 ‘금수저냐’ ‘돈이 남아 도냐’는 따끔한 충고가 날아온다. 예를 들어 삼겹살을 사 먹은 뒤 인증글을 올리고 “저녁 식사가 과했나요?”라고 글을 올리면 “기념일이 아닌 평범한 날에 고기는 과하다”는 답변이 올라오는 식이다.

거지방 성향은 제각각이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농담형’으로 운영되는 방이 있는가 하면, 진지하게 소비 성향을 분석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방도 적잖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거지방은) 일종의 놀이 문화다. 금전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상황은 좋지 않지만, 약간의 유머를 더해 힘든 상황을 극복해보자는 취지로 거지방이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거지방이 대화를 통해 피드백을 주고받는다면, 무지출 챌린지로 대표되는 인증형은 자신의 절약을 SNS에 자랑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무지출 챌린지란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지출을 아예 하지 않는 도전이다. 특정 기간을 설정하고 해당 기간 동안 돈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SNS에 정리해 업로드한다. 인스타그램에 글과 사진 게시글을 올리거나,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브이로그를 올리는 방식이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는 ‘무지출 챌린지’ ‘무지출 챌린지 브이로그’ 등 무지출 챌린지에 도전하는 콘텐츠와 게시물이 넘쳐난다. 인스타그램에 ‘무지출’과 ‘무지출 챌린지’가 태그된 게시물 수는 1만개에 달한다. 실명으로 올리는 일반 SNS는 물론 디시인사이드, 더쿠, 에펨코리아 등 익명으로 글을 쓰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무지출 인증글’을 올리기도 한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필요가 없는 온라인 공간에서 소비 습관을 자랑하며 얻는 즐거움이 ‘무지출 챌린지’의 동력으로 작용된다”고 설명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거지방’을 검색하면 수백 개의 방이 뜬다(좌). 거지방에 들어가면 결제 내역을 올리고 공유한다(우). (카카오톡 화면 갈무리)
왜 그들은 ‘절약’을 과시할까

위로·안도감·성취감이 절약으로

젊은 세대는 왜 하필이면 ‘절약’과 ‘가난’을 과시할까.

원인을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반발 심리, 위로와 안도감 그리고 ‘성취 욕구’ 등이다.

우선 반발 심리다. 코로나19 유행 이전 한국 사회는 ‘플렉스’라는 말이 성행할 정도로 명품에 돈을 쓰는 게 유행이었다. 코로나 유행이 한창일 때도 플렉스 열풍은 꺾이지 않았다. 백화점 명품관에서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오픈런’ 등의 행태가 만연했다. 초고급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는 ‘호캉스’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필수’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청년 세대가 이런 소비 생활을 누리지는 못했다. 소비력이 없는 대다수 젊은 세대는 공감하지 못하는 유행이었다. 과도한 소비에 지친 젊은 세대의 반발 심리에서 ‘절약’을 보여주는 유행이 시작됐다는 분석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몇 년 동안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소비하는 사회였다. 소비만 강조하는 사회에 일부가 느꼈을 피로감이 굉장했을 것이다. 이때까지 자신의 형편을 부풀려서 자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소비보다는 절약하는 것이 대부분 청년들의 일상에 가깝다. 과소비에 대한 반발 심리가 ‘절약’을 내세우고 과시하는 문화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위로와 안도감이다. 본인이 금전적 빈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거지방 등 커뮤니티나 SNS 활동에 참여하는 행위만으로 동질감, 위로, 안도감을 받는 등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곽금주 교수는 “ ‘나만큼 힘든 사람들이 많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큰 안도감을 얻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성취감도 많은 사람들이 과시 절약을 하는 이유로 꼽힌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와 코로나라는 재난까지 겹친 와중에도 오히려 경제적인 절약을 통해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소비 성향 측면에서 보면 플렉스 문화와 과시 절약 문화는 대척점에 서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목적을 보면 결국 성취감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플렉스 등 보복 소비는 남들에게 자기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성취감, 자존감을 채워나가는 것이고, 과시 절약은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덤덤하게 인정하면서 자존감을 얻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물가가 오르기 전까지는 명품을 활발히 사는 ‘플렉스’ 소비가 유행이었다. 매장에 줄을 서서 물건을 사기도 했다(위). 그러나 물가가 급격히 상승하고 주머니 사정이 얇아지면서, 아껴 쓰는 것이 ‘미덕’인 사회로 바뀌었다(아래).
과시 이면에는…텅 빈 주머니

긍정적으로만 볼 문제는 아니야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일종의 ‘놀이 문화’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과시 절약이지만, 무작정 긍정적으로만 볼 사안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과시 절약의 이면에는 청년 빈곤층 증가라는 사회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실제로 20대는 60대와 더불어 ‘유이’하게 지출이 줄어든 세대다. 통계청 속보 지표인 나우캐스트에 따르면 5월 5일 기준 20대 이하 신용카드 이용액은 2020년 1월에 비해 0.8% 줄었다. 전 연령대에서 가장 저조한 수치다. 지출이 줄어든 세대는 20대와 60대(-0.4%)뿐이었다. 같은 기간 다른 세대는 지출이 오히려 올랐다. 30대와 50대는 각각 7.5%, 13% 올랐고, 40대는 1.7%로 소폭 증가했다.

금리 인상의 여파가 젊은 세대의 소비 감소로 이어졌다. 한국개발연구원이 공개한 ‘금리 인상에 따른 청년층의 부채 상환 부담 증가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기준금리 1%포인트 인상에 따른 20대의 연간 소비 감소폭은 약 29만9000원에 달했다. 30대는 연간 20만4000원의 소비를 줄였다. 지난 2021년 0.5%였던 기준금리가 올해 3.5%로 3%포인트 상승한 것을 고려하면 20대는 연간 89만6000원을, 30대는 61만3000원의 소비를 덜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출 감소세만큼 대출 증가세도 가파르다. 한국은행이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가계대출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30세대가 대부분인 ‘30대 이하’ 계층의 대출 급증세가 두드러졌다.

30대 이하 대출 잔액은 지난해 4분기 현재 은행권과 2금융권을 합해 모두 514조5000억원(은행 354조8000억원, 2금융권 159조7000억원)으로 추산된다. 3년 전인 2019년 4분기 404조원(은행 278조1000억원, 2금융권 125조9000억원)보다 27.4%나 늘어난 수치다.

30대 이하 대출 증가율은 60대 이상(25.5%), 40대(9.2%), 50대(2.3%) 등 나머지 모든 연령층보다 높다. 3년간 대출 증가액 역시 30대 이하가 110조5000억원으로 1위다. 대출자 1인당 평균 대출액(대출 잔액을 차주 수로 나눈 값)이 가장 많이 늘어난 계층도 20대와 30대다. 은행권 30대 이하 대출자 1인당 평균 대출액은 2019년 4분기 5980만6000원에서 3년 뒤 2022년 4분기 7081만8000원으로 18.4% 증가했다. 2금융권 30대 이하 대출자 1인당 평균 대출액은 5413만6000원으로, 2019년 4분기(4101만원)보다 32% 뛰었다. 다른 세대보다 증가율이 월등히 높다.

전문가들은 과시 절약 현상에 담긴 청년층의 어려움을 직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은희 교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외부 요인만 탓하지 않고 스스로 절약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나가려 하는 모습은 긍정적이다. 다만, 그만큼 대다수 젊은 세대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전했다.

보여주기에만 집중하는 일부 청년들의 철없는 행동에 진짜 어려운 청년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묻힐 수 있다는 주장도 눈길을 끈다.

“절약이 아닌 ‘과시’에 초점을 둔 청년이 적잖다. 과시가 절약의 본질을 해쳐서는 안 된다. 일부 철없는 사람들의 장난에 진짜 절박한 상황에 놓인 청년의 목소리가 묻힐 수도 있다. 남과 경쟁한다는 경쟁 심리가 아닌, 자신을 위해 돈을 아껴 쓰자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곽금주 교수의 진단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10호 (2023.05.24~2023.05.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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