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상류층 문화', 이 장면에 숨은 비밀
[김종성 기자]
▲ tvN <구미호뎐 1938>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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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판타지 사극 <구미호뎐 1938>처럼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드라마나 영화에 거의 어김없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천장의 화려한 조명이 실내를 환히 비추는 고급 클럽이나 술집에서 고위층 일본인이나 상류층 한국인들이 먹고 마시며 환담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런 장면에서는 일본어 노래를 간드러지게 부르는 여성 가수가 곧잘 등장한다. 이런 가수와 느낌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구미호뎐 1938>에도 클럽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나온다. 이 드라마 등장인물인 장여희(우현진 분)는 낮에는 양품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클럽 파라다이스에서 노래한다.
일제강점기 사극에 자주 나오는 상류층 문화는 당대를 풍요롭게 보이게도 만들고 낯설게 보이게도 만든다. 일본인과 소수 한국인들이 누린 그런 풍요는 한국인 일반 대중의 삶과 크게 대비됐다. 어느 시대나 빈부격차는 있었지만, 이 시기의 격차는 더욱 컸다. 일본인과 상류층 한국인이 누리는 화려함만큼, 일반 한국인 대중의 삶은 비참했다.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야 했던 이유
지난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했다. 7만 혹은 10만 명의 한국인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를 입은 것은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그 시기에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대거 넘어가게 된 것은 강제징용이나 강제징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생활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식민지 경제정책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간 결과였다.
그로 인해 <구미호뎐 1938>의 배경인 1930년대 후반에도 재일 한국인들의 규모가 상당했다. 2010년 <제2기 한일공동역사연구보고서> 제5권에 수록된 하종문 한신대 교수의 논문 '일본 본토 거주 조선인의 생활과 동원'에 따르면,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3만 명을 넘은 재일 한국인 숫자는 1930년에 약 30만이 됐고 1936년 말에는 약 70만이 됐다. 이 숫자는 1945년이 되면 약 237만으로 불어난다.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넘어가면 먹는 것부터 달라졌다. 가난한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 가서 특별히 큰돈을 벌지 않더라도, 일단 일본에만 들어가면 상황이 판이해졌다. 그만큼 한국에는 먹을 게 부족했던 것이다.
2019년에 <한국사학보> 제75호에 실린 이송순 고려대 연구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인 식생활의 지역성과 식민지성'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식생활과 관련해 "주식은 전체적으로 쌀만을 섭취하는 경우는 1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보리 및 다양한 잡곡을 혼용했다"라고 설명한다. 또 "조선인 중 약 30%는 1년 내내 육류·생선·계란 등의 어떠한 동물성 단백질도 먹지 못하는 처지였다"라고 말한다.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들까지 먹일 만한 쌀이 한국 내에서 생산됐다. 그런데도 한국인 87%는 쌀을 제대로 먹지 못해 잡곡을 혼용해야 했다. 건강을 위해 일부러 혼식을 한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으로만 건너가면 사정이 달라졌다. 일본에 가서 육체노동이나 날품팔이를 하는 경우에도 그랬다. 위 논문은 "재일 조선인은 주식으로 백미를 섭취하고 있었다"라며 "이들은 일본 내에서 거의 최하층이었지만, 쌀을 구입해서 쌀밥을 지어먹었다"라고 설명한다.
빈곤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토지조사사업
▲ tvN <구미호뎐 1938>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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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을 그 같은 빈곤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이다. 이는 농민이 다수였던 한국 대중을 전반적으로 몰락시키는 계기가 됐다.
2007년에 <한국행정사학지> 제21호에 수록된 곽효문 한영신학대학교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빈곤정책 형성의 재조명'은 "이 사업이 끝난 뒤 논의 64.6%, 밭의 42.6%가 소작지가 되어 전체 농가 수의 3.1%에 해당하는 지주가 경지 면적 가운데 50.4%를 차지하였고,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2%나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그런 뒤 "결국 근대적 토지소유권 제도를 확립한다는 미명 아래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지주의 소유권이 강화·확대되어 식민지 지주제가 확립되었다"라고 평가한다.
토지조사사업은 일반 한국인들의 경제적·법적 지위를 떨어트렸다. 이는 이들이 자기가 생산한 수확물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게 만드는 배경이 됐다. 이들은 자기 수확물을 값싸게 먹으려면 배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토지조사사업은 한국인들이 조세 착취에 더 강하게 노출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위 논문은 이 사업에 기반한 1914년 지세령으로 인해 일제의 세금 징수 능력이 배가돼 "지세 수입은 1910년 약 6백만 원에서 조사사업이 마무리된 1918년에는 1156만 9천여 원으로 약 2배 증가하였다"라고 말한다. 한국 토지에 대한 일본의 장악력 증대가 일본의 지세 수입으로 직결됐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영향권에 있을 때인 1905년부터 진행된 화폐정리사업도 한국인들의 빈곤을 촉진시켰다.
일본 대장성 국장 출신인 메가타 다네타로 대한제국 재정고문이 추진한 화폐정리사업은 한국인들의 경제력을 떨어트려 이로 인한 후과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위 논문은 "화폐개혁의 정리 과정에서 조선인을 희생시킨 대가로 막대한 백동화·엽전·은화·동화를 약탈한 일제는 화폐 유통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면서 신·구 화폐의 교환 과정에서 한국인의 기존 자산이 낮게 평가됨에 따라 한국인들의 파산이 늘어났다고 서술한다.
이렇게 한국인들은 1910년 이전부터 일본의 경제침탈로 인해 금융자산을 빼앗기고 1910년 이후에는 토지와 그 생산물을 어이없이 약탈당했다. 한국인들은 중노동에 종사하면서도 가진 것 없고 먹을 것 부족한 삶을 강요당했다.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식민지 한국에서 생산되는 것은 분명히 적지 않았다. 일본인들까지 먹여 살렸으니, 그것은 분명 풍요로웠다. 그런데도 한국인 대중의 삶은 열악했다. 일본인들과 상류층 한국인들이 가져가는 몫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소수가 그 같은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한국인 대중의 희생을 전제로 했다. <구미호뎐 1938>에 등장하는 화려한 클럽과 살롱은 그 같은 경제적 차별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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