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기억이 해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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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아침 뉴스 모니터링을 하다 한 아이의 얼굴 사진이 담긴 기사에서 멈췄다.
아버지가 이틀 뒤 아이 얼굴과 이름을 언론에 공개한 건, 그 부모에겐 언제까지나 가슴 아픈 기억을 계속 확인할 각오를 하는 일이다.
스쿨존, 건널목, 우회전 등이 은결이 사고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단서가 돼 나를 바로잡았다.
은결이를 공개한 그 부모의 호소도 가슴 아픈 이 사고를 기억해 더는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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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아침 뉴스 모니터링을 하다 한 아이의 얼굴 사진이 담긴 기사에서 멈췄다.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용이었을까. 예쁘게 손질한 머리에, 말갛다는 말 외엔 표현 안 되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며 귀엽게 웃고 있는 아이의 증명사진은 영정사진이 돼 있었다.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수원의 한 초등학교 근처 사거리에서 건널목을 건너려다 우회전하던 시내버스에 치인 8살 조은결군이다. 아이 아버지는 건널목 맞은편에서 아이가 건너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끔찍한 사고를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아버지가 이틀 뒤 아이 얼굴과 이름을 언론에 공개한 건, 그 부모에겐 언제까지나 가슴 아픈 기억을 계속 확인할 각오를 하는 일이다. 그 슬픔과 원통함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다만 내게 미친 영향은 얘기할 수 있다. 은결이 모습이 공개된 기사를 본 그날, 퇴근길 집 근처 초등학교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정지선 앞에 멈췄다. 이후로도 운전대를 잡으면 수시로 생각이 났다. ‘우회전 전 일시 정지’가 의무화되고 수차례 관련 기사를 쓰고 읽으며 머리로 알아도, 왠지 어색하고 때로는 뒤차 눈치에 마음이 급해져 멈추는 둥 마는 둥 하던 나쁜 습관이 사라졌다. 스쿨존, 건널목, 우회전 등이 은결이 사고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단서가 돼 나를 바로잡았다. 새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도 못 바꾼 행동방식을 마음 깊이 새겨진 기억이 바꿔냈다. 은결이를 공개한 그 부모의 호소도 가슴 아픈 이 사고를 기억해 더는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억은 실제 대단한 존재다. 신경뇌과학자이자 소설가 리사 제노바는 ‘기억의 뇌과학’에서 우리가 매일 걷고 말하고 먹고 마시는 일상생활 속 행동들도 우리 근육에 새겨진 기억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반복 훈련에 의해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1만 시간의 법칙’도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해 활용한 예다. 그렇지만 기억은 쉽게 남는 것이 아니다. 동영상을 찍는 카메라처럼 모든 광경과 소리를 기록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한 부분만 저장된다. 그런데 집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주의를 기울여 애써 입력한 기억도 의식해서 계속 떠올리지 않으면 잊힌다. 너무나 감동스러웠던 아이의 첫걸음마 순간도, 그 장면을 계속 보거나 이야기하며 떠올리지 않으면 다른 경험들에 묻혀 잘 생각나지 않는 게 인간의 기억이다.
이는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은결이 사건 전에는 민식이도 있었고, 승아도 있었다. 온 사회가 마음 아파하고 법도 만들었지만 잠깐 방심하는 사이 잊혔다. 그런 일은 또 있다. 지난해 10월 29일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이태원 참사가 터진 지 200일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보면 159명의 생명을 앗아간 비극을 기억하는 흔적은 벌써 흐릿해진 듯하다. 각자 입장이 달라 생겨난 갈등을 탓하기엔 우리가 잃은 것도, 바꿔야 할 것도 많은 게 사실이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참사나 참변을 보면서 변하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고 답답해하지만, 많은 변화는 기억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냥 잊어서 바뀔 수 있는 건 없다.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쉽게 얻어지거나 지켜지지 않는 기억에 대해 길게 얘기한 것은 그래서다. 제노바는 “기억을 정말 대단한 존재로 여긴다면, 기억의 진정한 위대함을 인정하고 기억을 잘 봐야 한다”고 적었다. 반복되는 참사와 참변을 줄여가기 위해서도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사회적 기억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일 것이다.
조민영 온라인뉴스부 차장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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