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78년만에 원폭 피해자 만났다…"너무 늦었다, 죄송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한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 동포들을 만났다. 한국 대통령이 히로시마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만난 것은 1945년 광복 후 78년 만에 처음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저녁 히로시마의 한 호텔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 만남 행사’를 갖고 “우리 동포들이 입은 이 원폭 피해는 자의든 타의든, 식민지 시절 타향살이를 하면서 입게 된 피해이기 때문에, 그 슬픔과 고통이 더 극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에게 “소중한 생명과 건강, 삶의 터전을 잃은 이중고였다”고 위로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10명과 히로시마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한인회 소속 9명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1970년 히로시마에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가 건립되고, 1999년 평화기념공원 밖에 있던 위령비가 공원 안으로 옮겨진 것을 언급하면서 히로시마 민단을 비롯한 관련 인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방일 기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 위령비를 공동 참배할 예정이라는 사실도 전했다. 한·일 정상이 공동으로 위령비를 공동 참배하는 것은 처음이다. 한국 정상으로서도 첫 참배다.
윤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의 위령비 참배가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여러분께 송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저와 기시다 총리는 위령비 앞에서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향에서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양국의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열어갈 것을 함께 다짐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오늘 늦게나마 여러분을 뵙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늦게 여러분 찾아뵙게 돼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거듭 사과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이 끝나자 주변에서 박수가 나왔다.
윤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에서 피폭 당시 상황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타지에서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정부, 국가가 여러분 곁에 없었다”며 “조만간 꼭 한국을 한번 방문해 주시기를 초청하겠다. 모국이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꼭 한번 보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이 한·일 양국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 과거사를 계속 해결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변인은 “한·일 양국이 미래의 문도 열었지만, 과거의 문도 결코 닫지 않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일본 히로시마에 도착한 직후 한 호텔로 이동해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과 양자회담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2박 3일 ‘슈퍼 외교외크’ 일정에 돌입했다. 윤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력을 이행하는 데 있어 역내 대표 유사 입장국인 호주와 전략적 소통을 더욱 강화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앨버니지 총리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 인도·태평양 지역의 역내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윤 대통령의 리더십을 평가한다”고 화답했다.
양 정상은 상호보완적 경제구조를 가진 양국이 미래 첨단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핵심광물의 교역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이도운 대변인이 서면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글로벌 공급망 안정을 위한 협력을 지속해 나가기로 했으며, 국방·방산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에도 뜻을 모았다. 북한의 전례 없는 도발이 인도·태평양 지역뿐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의 평화와 번영에 심각한 위협이라는 인식하에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이후 같은 장소에서 윤 대통령은 팜 민 찐 베트남 총리와 한·베트남 정상회담도 열었다. 윤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양국 관계 발전에 정말 애 많이 쓰셔서 각별하게 감사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고, 찐 총리는 인도·태평양 전략, 글로벌 중추국가 등을 언급하며 “윤 대통령께서 하고 계신 이니셔티브 전략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20일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순서대로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현재 협의 중인 다른 양자 정상회담 일정은 협의가 완료되는 대로 발표할 계획”이라며 “다자회의 특성상 이미 확정된 양자 일정도 갑작스럽게 조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21일이 외교 빅데이다. 윤 대통령은 기시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다. 한·미·일 3국 정상회담도 직후에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한·일 정상회담은 지난 7일 서울 회담 이후 2주 만이다. 경제·안보·문화 협력과 청년 교류 등이 본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주요 사안을 점검하고 양국 간 협력 의지를 강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회담은 12년 만에 재개된 한·일 정상 ‘셔틀외교’ 틀을 굳히기 위한 차원도 있다는 것이 대통령실 설명이다. 한·미·일 정상회담에 대해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히로시마에 도착했기 때문에 3국 정상회담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에 윤 대통령은 G7 의장국인 일본 초청에 따라 참관국(옵서버) 자격으로 히로시마를 찾게 됐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G7 정상외교에 대해서 “윤석열 정부 2년 차 외교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로 규정했다. 이도운 대변인은 일본 출발에 앞서 가진 용산 청사 브리핑에서 “이번 G7은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국제질서가 다변화하는 중요한 시기에 안보·경제·산업 등에서 국제 연대를 공고히 하며 우리 국가이익을 최대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G7 확대회의 연설과 관련해서 이 대변인은 “식량·보건·젠더·기후변화·에너지·환경 같은 글로벌 의제에 적극 참여해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우리의 위상과 리더십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부연했다.
한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G7 정상회의에 대면으로 참석할 예정이라고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이 보도하면서 윤 대통령과 면담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관계자는 “회동 여부 등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말을 아꼈다. NYT 보도 등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G7 정상들에게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자국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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