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한·일 셔틀외교 복원, 전방위 국익 외교 기회로 활용해야
일본 기시다 총리가 지난 7~8일 방한한 것은 셔틀외교로서는 전례 없는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방일한 지 두 달도 안 된 데다,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오늘(19일) 다시 방일해 기시다 총리와 회담하는 일정에 비춰보면 그렇다. 한·일 관계 정상화를 결단한 윤 대통령을 배려하면서 오랜 정체기를 거쳐 모처럼 만들어진 양국 관계 회복의 모멘텀을 공고히 하려는 기시다 총리의 의도가 담겼다고 본다.
기시다 총리가 방한 중 표명한 과거사 발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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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도한 양보 여론 상쇄하려면
경제·안보·문화 협력 강화하고
과거사와 기타 협력 분리해야
한·중·일 삼각 공조 재건 필요
」
첫째, 일본 자민당 정부는 “역대 내각의 과거사 관련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되, 그 입장에 들어 있는 반성과 사과를 되풀이하여 표명하지 않겠으며 새로운 반성과 사과도 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일본 국력의 상대적 저하,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경제·군사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으로부터의 위협 증대, 한국의 놀라운 경제적 성장 등을 배경으로 일본 정치와 사회는 보수화하고 있다. 진보 성향의 제1 야당 입헌민주당은 점점 약체화하고, 자민당이 압도적 다수 의석을 점하는 구도가 변하지 않고 있으며, 보수 우익 성향이 가장 강한 일본유신회가 제2 야당으로 약진하는 상황이다.
일본의 보수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보수 정권이 지속하는 한 일본 총리의 과거사 사과와 반성 표명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또 한·일 정부가 타결한 ‘불가역적’ 위안부 합의가 정권 교체 후에 파기되고, 징용자 문제는 해결되었다는 기존 양국 정부의 인식을 대법원 판결이 뒤집은 것과 관련해 기본적으로 모든 책임은 한국 측에 있으며 일본은 오히려 피해자이기 때문에 반성과 사과 표명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근저에 있을 수 있다.
둘째, 기시다 총리로서는 과거사 반성과 사과는 표명할 수 없다는 한계 내에서 “당시의 힘든 환경 아래서 다수의 분들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생각을 하셨던 것에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가 재량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소회를 표명한 것으로 평가된다. G7 기간 중 윤 대통령과 함께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참배하기로 한 것도 한국 국민에게 자신이 과거사에 대해 가진 마음의 일단을 전달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사와 관련해 총리로서의 진정성을 한국 국민에게 호소하고 한·일 관계 발전에 대한 강한 의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한·일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첫째, 현 정부는 임기 말까지 일관되게 셔틀외교를 지속한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앞으로 한·일 관계가 순탄하게 전개되어 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자민당 정부의 과거사 입장이 진전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일본 정부가 일본의 관련 기업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금전적 기여를 하는 것을 권유하거나 용인할 것인지도 미지수이다. 우리 역대 정권이 과거사로 인한 국내 정치적 고려 때문에 대일 강경 자세로 선회하여 한·일 관계가 순식간에 악화한 사례들이 드물지 않다. 현 정부가 국내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징용자 문제를 결단한 것인 만큼, 흔들림 없이 한·일 협력과 교류를 추진해 나가야 미래 지향적 한·일 파트너십 토대를 만들 수 있다.
위안부, 징용자 문제 외에도 독도, 교과서 역사 기술,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은 앞으로 한·일 관계의 도전 요인이다. 우리 정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고 엄중한 입장으로 일본에 대응하되 이것이 한·일 관계 전반의 악화로 이어져서 미래를 향한 한·일 관계의 모멘텀이 상실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정부가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 일본에 과도하게 양보했다는 여론을 상쇄하기 위해서도 경제·안보·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미래 지향적 한·일 협력과 교류를 심화하여 최대한의 국익이 창출되도록 노력을 기울여 가야 한다.
한·일 관계는 여야 진영 간 입장차가 가장 큰 분열적 이슈로서 국내 정치 수단으로 이용되기 쉽다. 그러나 여야를 막론하고 과거사와 다른 한·일 협력 관계는 분리 대응한다는 자세로 임해야 어느 쪽이 집권하더라도 한·일 관계 경색이 우리 외교 정책의 큰 장애 요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정부는 정상화된 한·일 관계를 전방위적 국익 외교를 추구하는 기반으로 활용해야 한다. 중국은 우리와 가치를 달리하지만, 제1 무역 상대국이자 북한의 생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대 이웃으로서 경제·안보에서 중요한 나라다. 다만 격화되는 미·중 경쟁으로 인해 한·일 모두 중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쉽지 않은 외교적 과제이다. 한·미·일 협력은 북·중의 잠재적 안보 위협에 대비하고 이 지역 평화와 안정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다. 북·중을 고립시키거나 북·중과의 대결 전선을 펼쳐 이 지역의 갈등과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중국으로서도 한·미·일 협력이 강화될수록 한·일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것이다.
올해 한국이 개최하는 한·중·일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한·중 관계 개선뿐 아니라 한·중·일 협력의 기운을 되살리는 것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한·미·일 협력을 더욱 심화·확대하면서 일정 수준의 한·중·일 협력도 추진해야 이 지역 안정과 평화가 증진된다.
친미와 친중으로 분열된 국내 정치 현실에 비추어도 강건한 미·일과의 관계와 함께 안정적 한·중 관계를 만들어야 폭넓은 국내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나아가 한·일, 한·미·일 협의와 협력 심화를 통해 이 지역 안정과 발전의 중요한 열쇠를 쥔 아세안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것은 우리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전개하는 데 상당한 자산이 될 것이다.
또 인도·호주·유럽연합(EU) 등 민주주의 가치 공유국들과의 파트너십 강화를 위해, 또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국익을 증진하기 위해서도 일본과 긴밀히 협력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당장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무대에서 한국이 장래 G8의 일원이 되기 위한 긍정적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채운 반 컵의 물잔은 일본의 과거사 관련 조치보다는 한·일 관계 증진으로 만들어지는 국익으로 채워야 할 것이다. 과거를 망각해도 과거에 집착해도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이혁 전 베트남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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