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슬의 숫자읽기] 비응급환자가 앗은 삶
또 아이가 죽었다. 대구에서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사망한 청소년에 이어, 서울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소아청소년과 진료를 볼 수 있는 의사의 부족이다. 그렇지만 소아과 의사 부족은 총체적 의료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하는 문제라, 단기적인 해결이 불가능에 가깝다. 핵심적인 원인일 수는 있지만, 현상 변경이 쉽진 않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보다 해결 가능한 다른 원인인 비응급환자의 응급실 내원 문제를 짚어보는 일이 꼭 필요하다.
국가응급진료정보망(NEDIS)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응급실 내원 환자 수는 480만 명 정도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1만3000명씩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말인데, 이들 중 상당수가 경증 비응급환자인 게 문제다. 국내에서는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의 응급도를 5단계로 구분하는데, 비응급으로 분류되는 4단계와 5단계 환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49%에 육박한다. 굳이 응급실에서의 긴급한 진료가 필요하지 않은 환자가 응급실 환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다. 기나긴 응급실 대기와 ‘응급실 뺑뺑이’의 원인으로 비응급환자 비중도 따져 물어야만 하는 이유다.
물론 경증 질환으로 응급실을 방문하는 환자들도 할 말은 있다. 마땅히 근처에 방문할 의료기관이 없을 때 응급실을 방문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중앙응급의료센터의 응급의료서비스 이용자 실태조사를 보면 응급실 내원 환자의 절반은 ‘거리’와 ‘진료 가능성’을 응급실 방문의 이유로 꼽았다. 야간이나 휴일 같은 동네 의원의 의료공백 시간대에 발생하는 미충족 의료수요가 24시간 열린 응급실로 쏠리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정황은 ‘2021 응급의료 통계연보’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요일별 응급실 내원 통계를 보면, 다른 의료기관이 문을 닫는 주말에는 응급실 내원 환자 수가 주중보다 25%이나 는다. 게다가 비응급환자 비중도 주중에는 환자의 47.9%에서 주말에는 57%로 약 10%포인트 증가한다. 이런 상황을 해소하고자 비응급환자에 대한 추가 비용으로 가격에 따른 수요 통제를 유도하고는 있지만, 실손보험 등으로 인해 이런 허들도 잘 기능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해법이 없을까.
한 가지 가능성은 비대면진료다. 응급실을 방문하는 비응급환자의 상당수는 약 복용만으로도 나아지는 환자들이다. 그러니 응급실로 쏠린 미충족 의료수요 중 일부는 휴일이나 야간의 비대면진료를 통해서도 충분히 해소될 수 있다. 그럼 응급실 뺑뺑이도 완화된다. 그렇지만 최근 확정된 소아 중심의 비대면진료 시범사업 내용으론 그런 기능이 수행되기 어렵다. 정부도 관련된 여러 갈등이 부담스럽긴 하겠지만, 응급실 뺑뺑이 해소를 위한 다른 대안이 없다면 추후 입법 과정에선 이런 부분도 고려하길 바란다.
박한슬 약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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