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천의 컷 cut] 끝을 봐야 시작도 할 수 있다
막장 같은데, 막장 같지 않다. ‘부부의 세계’의 순한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닥터 차정숙’ 말이다. 이 드라마의 설정은 차정숙(엄정화)의 남편 서인호(김병철)가 부부의 의대 동기 최승희(명세빈)와 불륜 관계라는 것. 육아로 경력 단절이 됐던 차정숙은 20년 만에 레지던트 과정에 들어간 뒤에야 둘의 관계를 눈치챈다. 치가 떨리지만 참기로 한다. “아이들의 엄마”여서다.
그러던 어느 날, 차정숙은 두 사람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택시에 올라탄다. “방금 나간 차 좀 쫓아가 주세요.” 차정숙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기사님. 그냥… 세워주세요.” 추격전은 중단되는 것인가? 택시기사의 판단은 다르다. “아니, 끝을 봐야 시작도 할 수 있는 겁니다.” 막장드라마의 클리셰를 깼다고 평가받는 명장면이다.
왜 브레이크를 밟으면 안 되는 걸까. 끝을 보지 못하면 악순환의 도돌이표 속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끝없는 의심과 좌절의 언저리만 맴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실을 안다고 뭐가 달라지느냐고? 끝을 보는 게 고통스럽더라도, 끝내 새 출발을 못하게 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적어도 상황이 왜곡되고 악화되는 걸 멈출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현실의 우리는 진실 앞에서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주저앉는다. 진실을 대면하기가 불편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서 대충 덮고 넘어가려고 한다. “모두를 위해 한 번만 참지, 뭐.” 남들은 모르는 자신만의 ‘정신 승리’다. 그렇게 ‘실패’는 시작의 또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보아라. 결국 파국이다.” 남편 서인호로 나오는 김병철이 드라마 ‘도깨비’에서 남긴 대사다. 다시 잘 생각해보면, 파국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파국이 있어야 새로운 내일, 새로운 세상도 열릴 수 있다.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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