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한전 사장 잔혹사
에너지 공기업의 맏형인 한국전력 사장 자리는 영예로운 자리로 통한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차관 정도는 지내야 하마평에 오른다. 자산 규모 235조원으로 공기업 몸집 1위이고, 임직원 수도 2만3000명이 넘는다.
한전엔 가격과 수량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 정치 바람을 타는 전기요금 결정체계의 후진성 탓에 제때 전기요금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국제유가 추이에 따라 큰 폭의 흑자와 적자가 널뛰기하듯 춤췄다. 아무리 좋은 경영자를 모셔와도 대외 여건에 휘둘리니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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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김쌍수 “나 하나로 끝나야”
시총 12조 회사, 26조 자구안 발표
현재로는 누가 사장 돼도 마찬가지
」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처음으로 민간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이 사장에 임명됐다. CEO 시절 ‘혁신의 기수’로 불리며 직원들에게 ‘독한 열정’을 주문했던 김쌍수 전 LG전자 부회장이다. 공기업에 혁신 바람을 불어넣을 적임자라는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원가보다 낮은 전기요금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2008년 한전은 사상 첫 적자를 냈다. 재임 기간 내내 적자는 이어졌고, 김 사장은 소액주주들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그는 임기 만료 직전 “이런 사장이 나 하나로 끝나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후임은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김중겸 사장이었는데, 요금 인상을 둘러싸고 정부와 각을 세우다가 1년 만에 스스로 물러났다.
김종갑 한전 사장은 산자부 1차관을 지내고 하이닉스 사장과 지멘스 회장을 거쳤다. 하이닉스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경영 능력도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가 2018년 이런 어록을 남겼다. “수입 콩값이 올라갈 때도 두부값을 올리지 않았더니 이제는 두부값이 콩값보다 싸졌다.” 두부값은 전기요금을, 수입 콩값은 연료비를 가리킨다. 결국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었다.
한국가스공사 사장과 산자부 1차관을 지낸 정승일 사장은 2021년 6월, 최악의 시기에 한전 사장으로 왔다. 그해 6조원의 영업적자를, 지난해 역대 최대인 33조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래도 벼랑 끝의 한전을 이끌기에 그만한 인재도 없다고 생각했다. 산자부에서 2년간 에너지산업정책관을 지낸 전문가였고, 국·과장 시절 방폐장 건립, 밀양 송전탑 건설 문제 등 사회 갈등이 극심한 사안들도 이해관계자와 소통하며 무난하게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차관 시절, 청와대를 설득해 산자부와 한전의 숙원이었던 연료비연동제 도입을 이끌어낸 것도 그였다. 최근 2~3년간의 국제유가 급등은 연동제 도입을 결정했던 2020년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부는 원료비가 단기에 급등하면 연동제를 유보할 수 있게 했고, 그런 정치적 결정이 한전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지난 정부가 임명했다고, 또 한전 구조조정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정 사장은 여당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았다. 네 편 내 편 따지지 않고 인재를 널리 구해도 부족할 판에 그런 식으로 전 정권 딱지를 마구 붙이면 살아남을 관료가 몇이나 될까 싶다. 구조조정도 고통 분담 차원을 넘어섰다. 시가총액 12조원 회사에 26조원의 자구안을 내도록 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다. 꼭 필요한 전력망 투자까지 펑크 날 수 있다. 자구가 아니라 자해에 가깝다는 전문가 지적을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지난주 정 사장은 결국 사의를 표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현안엔 말을 아꼈다. 겨우 들은 얘기다. “지난 정부와 현 정부에서, 지난 2년간 전기요금 인상을 위해 뛴 것밖에 없다. 아무리 복기해 봐도 똑같이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정부가 어제 2분기 전기요금을 뒤늦게 소폭 인상했다. 연동제에 따라 올해 3분기와 4분기 요금 인상이 이뤄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어제 한전 주가는 2% 넘게 빠졌다. 요금 결정에서 정치를 걷어내지 않는 한 정 사장 후임에 누가 오든 ‘한전 사장 잔혹사’는 계속될 것 같다.
글 = 서경호 논설위원 그림 = 안은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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