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사태 불편해도…블록체인 기술은 ‘가속 페달’ [Deloitte 금융 인사이트]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곧바로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은 러시아를 규탄하며 제재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제재안 발표 이후 전쟁 공포로 급락했던 글로벌 증시가 반등하기 시작했다. 미국 제재 발표에 앞서 금융 시장의 가장 큰 관심은 러시아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배제 여부였다. 그런데 정작 제재 내용에 러시아의 SWIFT 배제가 포함되지 않자, 금융 시장 참가자들은 미국 제재가 예상보다 약하다고 받아들였고, 주가가 일시 반등했다.
그러나 미국 제재안 발표 시점에서 불과 이틀 후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러시아를 SWIFT에서 퇴출하는 추가 제재를 발표했다. 일부 언론 매체는 이를 ‘금융 핵무기’로 표현했다. 과거 이란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서방의 제재로 이란 은행의 SWIFT 배제가 실시됐을 때 이란 경제가 받은 충격이 핵 공격을 받은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SWIFT 시스템 파괴력 크지만
국가 간 송금 비효율 비판도 커
SWIFT는 전 세계 200여개국 1만1000개가 넘는 금융기관이 안전하게 결제 주문을 주고받기 위해 사용되는 전산망이다. 이곳에서 퇴출당하면 결제망의 은행을 이용한 달러화를 비롯한 외화 결제 거래 자체가 불가해 국제 금융 시장에서 고립된다. 그러나 전 세계 국제 결제·송금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뿐, SWIFT는 사용자 중심 편의나 효율적 시스템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국가 간 송금의 경우 송금자는 송금 수수료, 수취 수수료, 중개 수수료 등 다양한 수수료를 지불한다. 특히 SWIFT 시스템을 이용하면 추가로 전신료가 발생해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또한 송금이 완료되기까지 수일 걸리는 탓에 비효율적이다. 직접 SWIFT를 이용할 경우 은행 영업시간에만 송금이 가능해 국가 간 시차가 클 경우 송금에 걸리는 시간은 더욱 길어진다. 이처럼 각종 수수료와 느린 프로세스에도 불구하고 해외 송금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해외 송금 서비스는 금융기관이 제공하는 대표적인 서비스로서, 오랜 기간 동안 비교적 소수 은행을 통해서만 제공됐다. 이런 해외 송금 서비스는 실물, 즉 현금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장부상으로만 그 거래 내역이 기록될 뿐이다. 따라서 금융기관 사이에서도 신뢰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송금과 같은 금융 거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금융기관 신뢰는 각 국가가 해당 금융기관에 금융업 관련 면허를 발급함으로써 형성된다. 금융 거래에 거래 상대방 모두의 신뢰를 받는 중개인이 필요한 상황에서, 금융업 면허 발급은 신뢰를 부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었다. 다만 이런 금융업 면허 제도는 외부에서 금융업으로의 진출을 어렵게 해 금융기관 스스로 치열한 변화나 발전을 저해하는 양면성을 가져왔다.
금융기관의 여러 서비스를 포함해 SWIFT도 이런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SWIFT는 국제 결제 시스템의 중추적 역할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비효율성과 높은 비용이라는 문제점이 개선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비용·속도 앞서며 전통 금융 위협
그러나 블록체인 기술과 가상자산 등장으로 상황이 변하고 있다. 비트코인 출현과 함께 등장한 블록체인 기술은 금융 거래를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중개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기존 생각을 바꿔놨다. 블록체인의 분산원장 기술은 그동안 중개인에 집중화돼 있던 신뢰를 네트워크상으로 분산시켜도 금융 거래가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해외 송금 사례로 다시 돌아가보자. 블록체인 기술과 가상자산을 이용한 해외 송금은 이를 구현하기 위한 이론·기술 자체가 복잡할 수 있다. 하지만 이용자 입장에서 가상자산을 통한 해외 송금 과정은 매우 간단하다.
가상자산을 통한 송금 과정은 국내외 송금 여부와 무관하게 기본적으로 법정통화(Fiat currency)를 가상자산(암호통화 등)으로 바꾸는 과정인 ‘온 램프(On-ramp)’와 가상자산을 법정통화로 다시 바꾸는 ‘오프 램프(Off-ramp)’ 과정이다. 중간 과정인 가상자산의 이동은 기존 송금 프로세스상 요구되는 금융기관과 같은 중개기관 없이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노드(Node)’들의 거래 인증을 통해 진행된다. 따라서 송금을 하고자 할 경우 가상자산을 보관할 지갑(Crypto wallet)을 보유하고 온·오프 램프(On·off ramp)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업체를 찾기만 하면 된다.
가상자산을 통한 이런 송금 과정은 이용하는 블록체인 네트워크상 수수료 정도만 발생한다. 이 때문에 해외 송금으로 발생하는 지불 비용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여러 단계의 중개기관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송금 속도 역시 빠르면 몇 초, 길어야 몇 분 정도로 줄어든다. 그러나 가상자산을 통한 해외 송금은 아직 제도권 아래 보호받는 전통 금융 산업의 울타리 밖에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기존 금융사, 블록체인 도입 활발
마스터카드 토큰화 거래 월 20억건
그렇다면 전통 금융 산업 울타리 안에서의 상황은 어떨까? 그간 가상자산에 회의적이었던 금융기관도 점차 블록체인 기술이 금융 서비스에 매우 적합한 기술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적으로 규모가 큰 대형 금융기관들이 점차 블록체인 기술을 자신들의 전통 금융 산업 내로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세계 최대 규모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11월 뉴욕타임스(NYT)의 ‘딜북 서밋’에서 ‘미래 시장과 증권의 토큰(Token)화’를 전망하면서, 블록체인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블랙록은 이미 가상자산 거래소인 코인베이스와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다수 기업 고객을 상대로 가상자산 매매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다른 대형 금융기관인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솔로몬 CEO는 가상화폐 거래소 FTX 파산 사태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블록체인에 대해 여전히 유망한 기술이라고 평가하며, 투자 유치와 증권 거래와 같은 분야에서 제도권 금융기관도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음을 언급했다. 골드만삭스의 디지털자산팀과 산탄데르, 소시에테제네랄은행 등이 공동 주관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 비너스’를 통해 실행된 디지털 채권 발행은 당일 결제에 성공했다. 보통 채권 매각 업무는 5일이 소요되는 데 비해 그 기간이 크게 단축된 것이다.
토큰화에 대해 가장 긍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인물은 마스터카드의 마이클 미에바흐 CEO다. 그는 “거래하고자 하는 어떤 것도 토큰화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 안전한 거래를 중개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딜로이트글로벌의 ‘테크트렌드 2023’ 보고서에 따르면, 자본 시장 자산의 토큰화가 기업 블록체인 활용 사례로 부상한 것은 기존 시스템의 비효율성 때문이다. 보고서는 현재의 시스템 아래 채권 발행에 보통 6주가, 배당금 지급 절차는 25일이 각각 걸린다고 지적했다. 또한 청산결제 비용은 매년 14% 상승하며 관련 시스템의 27%가 20년 이상 된 유물인 점을 기존 시스템의 비효율 이유로 들고 있다.
국내 금융사도 기술 투자 확대
가상자산 불편해도 기회의 장 열려
기존 국내 금융권도 블록체인과 가상자산에 관심을 두고 투자를 확대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인다. 이미 2021년에 신한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한 해외 송금 기술을 개발하고 검증까지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KB국민은행의 경우 카카오의 블록체인인 클레이튼(Klaytn)을 기반으로 하는 ‘멀티에셋 디지털 월렛(Multiasset Digital Wallet)’을 시험 개발했다고 밝혔다. 클레이튼은 한국은행이 추진하는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CBDC)의 실험에 사용되는 블록체인 플랫폼이다. 우리은행은 2022년 1월 자체적인 블록체인 플랫폼 구축을, 하나은행은 포스텍크립토블록체인연구센터와 함께 CBDC 기술 검증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신한은행, KB국민은행, 우리은행, NH농협은행 모두 블록체인 업체와 합작법인 설립 또는 지분 투자 형식으로 가상자산 커스터디 서비스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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