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다 내가 죽을 그 이름, 비밀번호
경증의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대안학교의 특수교사로 11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발달장애 학생들이 자립과 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 및 수업을 합니다. 캠핑, 농사, 라이딩, 메타버스 등 여러 가지 도전을 하다 드디어 해외 자유여행까지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미디어에 자주 비치는 중증의 장애인들과 또다른 발달장애인들을 보며 장애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며 글을 씁니다. <기자말>
[권유정 기자]
발달장애 학생들과 프로젝트 수업을 시작한 건 이제 5년째, 그중에서도 '여행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4년째지만 4박 5일의 긴 여행을 떠나는 건 올해가 처음이다. 지난 3년 반은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제약이 있었다.
2020년에는 대면수업조차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부활동은 엄두도 못 냈고, 2021년과 2022년 상반기까지는 당일치기 여행이나 한적한 곳에서 1박 캠핑 정도를 진행했다. 코로나 전후로는 여름캠프 등의 행사를 했지만 전교생 단체활동으로,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지참하는 돈은 간식을 사거나 한 끼 정도 자유식사를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4박 5일의 자유여행은 공통비용을 제외하고 식사, 교통, 간식, 쇼핑만으로도 인당 20~30만원의 돈을 각자 소지해야 했다.
환전, 얼마나 어떻게 해야할까?
개인적으로 여행을 다닐 때에도 환전은 가장 골치 아픈 일 중 하나였다. 얼마나 바꿔야 할 지도 머리 아프고,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부담되고, 남은 외화를 처리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트래블월렛이라는 선불 충전식 해외사용카드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직접 사용해 보니 몹시 편리했다. 원화 계좌를 연결만 해놓으면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환전해 사용할 수 있고, 환율도 현금 환전보다 유리한 데다 현지 ATM 출금과 결제 수수료가 없고, 남은 금액은 쉽게 원화로 환급할 수 있다.
▲ 여행자 맞춤의 선불 충전식 해외사용카드 |
ⓒ 권유정 |
우선 평소 은행 어플을 사용하는 아이들부터 틈틈이 불러 발급에 도전했다. 생년월일, 계좌번호 등 개인정보만 숙지하고 있으면 카드 신청은 어렵지 않았다. 첫 아이가 성공하자 소식을 들은 몇몇 아이들은 마음이 급했는지 저희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더니 혼자서도 카드를 신청하고 왔다. 기특도 하지. 그렇게 3분의 1 가량은 비교적 손쉽게 카드를 만들었다.
문제는 나머지. 예상대로 계좌 인증이 난관이었다. 은행 어플을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아이들은 차라리 나았다. 어플 설치와 회원가입 과정만 한 번 더 거치면 되니까. 더 큰 문제는 이전에 가입한 적이 있는데 본인이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잊어버린 정보를 찾는 건 훨씬 더 과정이 복잡했다.
기껏 인증을 해서 회원가입을 신청하면 이미 가입된 회원이란다. 다시 인증을 해서 아이디를 찾으면 비밀번호를 모른단다. 또 인증을 해서 비밀번호를 찾으면 보안패턴을 입력하란다. 물론 패턴도 잊었으니 또 인증을 해야 했다. 심지어 한 아이는 휴대폰이 없을 때 계좌를 만들었는지 연동된 연락처가 보호자의 번호였다. 일단 가정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비대면 상황에서 말로 과정을 설명하고 안내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검색을 통해 고객센터에 연락하면 연동된 연락처를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고객 상담도 이메일이나 카카오톡 문의가 주류가 된 시대에는 전화상담 연결도 쉽지 않았지만 친절한 블로그 이웃들 덕분에 무사히 연락처를 바꿀 수 있었다.
그나마도 개인정보 외우든 찾아서 보고 하든 스스로 인증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은 오래 걸릴지언정 어떻게든 가르쳐 카드 신청을 완료할 수 있었다. 아예 인증을 해본 적이 없고, 할 줄 모르는 3분의 1 가량은 개인정보 보안문제를 감안하여 부득이하게 부모님과 함께 카드를 신청하도록 했다.
▲ 비밀번호 숙지를 공지로도 내보냈건만. |
ⓒ 권유정 |
스마트폰만 있으면 앉은자리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이다. 물론 그게 온전히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을 잘 다룬 덕분에 과도한 소액결제나 피싱사기, 심지어 대출까지 받아 문제가 생기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상황판단이나 조절 능력 등이 미숙한 아이들을 우려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전의 세대가 스마트폰의 편리함 없이도 필요한 것들을 다 하며 살았으니 굳이 가르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부모님의 세대와 나의 세대가 다르고, 우리 아이들의 세대는 또 다르다. 은행, 공공기관, 쇼핑 등 삶에 필수적인 여러 영역에서 직접 대면하여 처리하는 창구는 급격하게 축소되고 대부분이 온라인으로 대체되고 있다. 미래는 더 빨리, 더 많이 변화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개인정보를 인증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과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대가 아니다. 평생 보호자가 대신해 줄 수도 없다.
시대는 변하고 교육도 변해야 한다. 아이들의 삶에 꼭 필요한 기술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대가 아닌 아이들의 시대에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못 할 거라는 생각과 문제가 생길 거라는 우려로 제한하기보다는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삶에 유용한 기술들을 최소한의 도움으로 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적을수록, 타인에게 의존하는 영역이 클수록 자신을 보호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학생 혼자도 어렵고 부모님도 협조가 어려운 경우, 개인정보를 모두 공유하며 학교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물론 학교를 신뢰하는 건 감사한 일이나 앞으로를 생각하면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사람들만 주변에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악의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최소한 자신의 계좌에 입출금되는 금액을 확인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알릴 수 있어야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게 아닌가.
아이들은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는 기술은 능력 이상으로 빨리 배우기도 한다. 글자를 잘 모르는 아이들도 즐겨보는 유튜브 영상 등은 기가 막히게 찾아 들어간다. 인터넷 아이콘을 탁 누르니 검색창이 뜨고, 'ㄱ' 자판을 누르니 자동완성으로 '구글'이 나오고, 'ㅇ' 자판을 누르니 '유튜브'가 자동완성되고, 원하는 영상 목록이 주르륵 뜨는 일련의 과정을 보며 감탄한 적도 있다.
기술의 발전이 새롭고 유용한 방향뿐 아니라 다양한 사용자의 접근성을 보완할 수 있는 방향으로도 더 폭넓게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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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brunch.co.kr/@h-teacher)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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