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로 절망, 해외망명길 찾아
[김삼웅 기자]
▲ 석주 이상룡 선생.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때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때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
ⓒ 석주 이상룡 선생 기념사업부 홈페이지 |
일본은 1876년 불평등한 강화도조약 이래 조선침략의 야욕을 품고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였다. 동학혁명을 무차별 학살하고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죽였다. 그리고 제물포조약(1882년), 한성조약(1884년), 한일의정서(1904년), 을사늑약(1905년), 한일신협약(1907년) 등을 통해 손발을 묶고 외교·사법·경찰·군대를 장악하거나 해산시키고 마침내 1910년 8월 국권을 송두리째 탈취했다.
단재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에서 갈파한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에 대한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일제의 황국사관이나 이를 추종한 한국의 식민사학자와 그 아류들의 주장처럼 조선이 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국권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당시 의병들의 치열한 항쟁이 있었다.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의병부대들은 정규 일본군과 2,8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의병 수는 14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의병들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학살작전에 희생되고, 강점 후에는 일부가 만주로 옮겨가 독립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한말에 이르러 역대 군주가 무능하고 유약했으나 민중은 깨어 있어서 의병전쟁을 벌이고 각급 단체를 만들어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규모가 있었던 단체로는 독립협회·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우학회·한북학회·서북학회·호남학회·기호흥학회·교남교육회·관동학회·신민회·청년학우회 등이다. 이외에 개혁당·보안회·협동회·진명회·공진회·헌정연구회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대한제국을 지배하고도 쉽게 '합병'하지 못한 채 5년이나 지체한 것은 의병을 비롯한 한국민중의 치열한 저항 때문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전할 정도의 막강했던 일제가 막상 조선은 그만큼 집어삼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여기에 황국사학이나 식민사관의 허구성이 드러난다.
1910년 8월, 강도 일본에게 나라가 망하고 망국노가 된 이상룡은 어느덧 52세의 중년에 이르렀다. 길은 몇 갈래가 있었다. 왜적의 노예로는 살 수 없다면서 자진하는 길, 세상과는 등지고 초야에 묻혀 죽는 듯 사는 길, 국권회복을 위해 싸우는 길이었다. 을사늑약과 국치를 전후하여 이한응·조병세·민영환·김봉학·이상철·홍만식·송병선·최익현·박승환·홍범식 등 38명이 자진 순국하고, 안동에서도 김순흠·이만도·이중언·류도발·류신영·이현섭·권용하·김택진·김도현·이명우 부부 등 10명이 자진 순국하였다.
이상룡도 한때 같은 생각을 했으나 자손만대를 위해 살아남아서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데 생명을 걸기로 하였다.
매국노 원흉인 송병준과 이용구의 목을 베라는 상소문을 중추원에 올렸다. 이미 왜적의 앞잡이들로 구성된 정부가 상소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한동안 두문불출하고 국사를 저술하는 작업에 열중하였다. 긴 역사를 통해 고난과 외침을 극복한 사례를 찾고 이를 정리했다.
그즈음 서울의 신민회 간부들의 움직임이 전해지고 있었다. 1907년 1월 안창호·이동휘·노백린·전덕기·이회영·이동녕·신채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김구 등 대표적인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되어 활동한 신민회는 국치를 앞두고 해외에 독립전쟁의 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1910년 11월 어느날, 국치 이후 두문불출하고 새로운 조국 독립의 방략을 구상하고 있던 이상룡은 신민회에서 보내온 주진수와 황도영을 만났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이상룡은 그가 생각하는 구국방안과 신민회의 사업이 일치함을 알고 신민회의 사업에 찬동하여 도만 망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 이상룡을 비롯한 안동 유림 가족들이 살았다고 추정된 집들을 후손들이 살피고 있다 이상룡을 비롯한 안동 유림 가족들이 살았다고 추정된 집들을 후손들이 살피고 있다 |
ⓒ 박도 |
이상룡은 안동에서 의병, 대한협회 활동을 하면서 신민회와도 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관계로 해외독립운동기지 설립이라는 극비 내용을 알리며 함께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상룡은 망명할 것을 결정하면서 뒷날 자신의 망명기록인 <서사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10년 가을에 이르러 나라 일이 마침내 그릇되었다. 이 7척 단신을 돌아보니, 다시 도모할 만한 일이 없는데, 아직 결행하지 못한 것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일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바른 길을 택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우리 유가(儒家)에서 날마다 외다시피해온 말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연연한 바가 있어서 결단하지 못한 것이 아니며, 마음에 두려운 바가 있어서 결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다만 대장부의 철석과 같은 의지로써 정녕 백 번 꺾이더라도 굽히지 않은 태도가 필요할 뿐이다. 어찌 속수무책의 희망 없는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주석
1> 최덕수, <석주 이상룡연구>, <사총(史叢)>, 제 19집, 107쪽, 고려대학교 사학회,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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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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