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3등에 밀려났던 '피겨 여제'…이젠 '정치'서 다시 만나나

전수진 2023. 5. 1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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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휴즈가 장기였던 스파이럴 테크닉을 선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불가능해보였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2년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여자 피겨 부문 금메달리스트인 사라 휴즈를 두고 워싱턴포스트(WP)가 붙인 당시 기사의 제목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16세였던 휴즈는 만년 3등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피겨 스케이팅은 미국의 미셸 콴, 러시아의 이리나 슬루츠카야 선수의 경쟁 구도였다.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역시 둘이 금메달을 놓고 겨루는 구도였다. 그러나 최후의 웃는 자는 콴도, 슬루츠카야도 아니었다. 콴은 넘어지는 실수를 했고, 슬루츠카야 역시 원하는 만큼의 점수를 받지 못했다. 성조기를 제일 높은 곳에 올린 주인공은 사라 휴즈였다.

휴즈는 당시 시상식 직후 기자회견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목표를 갖고 빙판에 나가지 않았다"며 "'즐겁게 스케이트를 타자'는 마음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꿈이 이뤄지는) 이곳이 바로 올림픽이다"라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콴은 동메달, 슬루츠카야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사라 휴즈와, 그를 부러운 듯 바라보는 동메달리스트 미셸 콴. AP=연합뉴스


휴즈는 그러나 이듬해 자국 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 출전해선 6위에 그쳤다. 부담이 컸기 때문일까. 그는 곧바로 선수 은퇴를 선언했고, 예일대에 입학했다.

2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으니, 정계 진출이다. WP는 지난 17일 휴즈가 뉴욕시 하원의원 출마 결심을 굳혔다고 보도했다. 소속은 미국 현재 여당인 민주당이며, 자신이 나고 자란 뉴욕 롱아일랜드의 선거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이번 출마 선언은 다소 의외다. 휴즈는 예일대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전공했고 이어 펜실베이니어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일반 사회인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정치인으로서의 꿈이 있었다는 건 모르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런 그가 불혹을 앞두고 정계 진출이라는 꿈을 이루고자 나선 이유는 뭘까. 휴즈의 대변인인 맥스 크레이머는 성명서를 내고 "사라는 미국의 미래에 관심과 우려가 크다"라며 "오르는 물가, 공공 안전, 총기 폭력 그리고 여성 건강에 대한 위협 등등, 수많은 이슈 등을 위해 전면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라 휴즈가 2010년 한 시사회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후보 홈페이지도 개설했다. 휴즈가 "우리의 미래는 더 좋아질 수 있고 우리는 협력해나갈 수 있으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위대한 일을 함께 이룰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사진과 함께 게재돼있다.

재미있는 점은 휴즈에게 금메달을 내준 미셸 콴 역시 정계에 진출했다는 것. 콴은 1998년엔 은메달, 2002년엔 동메달을 획득했고 세계 선수권대회를 5번이나 제패한 뒤 은퇴했다. 결국 꿈에 그린 올림픽 금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지만 대신 그는 국제관계와 외교 분야를 공부하며 제2의 인생을 찾았다. 국제관계학 석사를 받고, 국무부에서 일하던 외교관 클레이 펠과 결혼도 했으나 4년만에 이혼했다.

이혼은 콴에게 새로운 시작이었으니, 조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 시절 그를 영입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당선 후 콴을 중남미 지역의 벨리즈 대사로 임명했다. 벨리즈는 과거 온두라스라는 국명으로 국내엔 더 익숙하다.

콴과 달리 선출직에 도전장을 낸 휴즈가 이번엔 어떤 결과를 낼지 미국 정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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