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3년 차, 시 읽는 모임에 나갑니다

도희선 2023. 5. 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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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함께 읽는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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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희선 기자]

시를 읽는 모임에 들었다. 자발적으로 모임에 발을 들인 것이 지난해 11월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친목 외에 순수한 취미생활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악기나 운동 따위를 배우러 가 본 적은 있지만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일종의 동호회 성격을 띠는 만남은 처음이다.

퇴직하던 해 코로나가 온 나라를 집어삼켰다. 슬기로운 은퇴 생활을 꿈꾸던 내게 여행은 고사하고 새로운 취미생활의 문도 굳게 닫혔다. 다행히 집을 짓느라 시간은 쏜 화살처럼 지나갔다. 2년 동안 설계부터 건축, 이사, 마당 정비까지 여러 가지 일들로 정신이 없다 보니 취미생활은 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퇴직 3년 차. 안정된 생활로 접어들자 집 근처 동네 책방으로 일주일에 한 번 어반 스케치를 배우러 갔다. 처음 몇 달간은 그림에 푹 빠져 집에서 몇 시간이고 연습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림 그리는 것만으로 채울 수 없는 허기가 들었다.

나른해져 가는 생활에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운동이나 악기는 섣불리 시작하지 못하겠고 도예나 뜨개질에는 관심이 없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으니 멀리 시내까지 새로운 것을 배우러 다니기는 운전도 시간도 부담스러웠다.
 
▲ 시집 함께 읽은 6권의 시집
ⓒ 도희선
 
이런저런 이유로 뭐든 시작하기를 망설이던 참에 시모임을 알게 됐다. 어반스케치를 배우러 다니는 동네 책방의 밴드를 통해 매월 시집을 읽는 모임이 있다는 것을 보고 솔깃했다. 학창 시절 가방 속엔 시집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시를 외우고 공책에 또박또박 옮겨 적기도 한 일은 까마득한 옛일.

사는 일에 쫓겨 갖가지 핑계를 대며 시집은커녕 책조차 가까이하지 않았다. 최근 십 년 동안 시집은 서너 권이나 읽었을까. 정서가 메말라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은 가슴에 감성의 빗물로 적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동네 책방지기 S도 시모임의 일원이었다. 그녀의 소개로 쉽사리 모임에 합류했고 S는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로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3년 전에 만들어진 모임은 국어교사로 퇴직한 H가 이끌었다. 매달 함께 읽을 시집 한 권을 리더인 H와 책방지기 S가 주로 선정한다. 때로는 책방지기 S가 여러 권의 시집을 추천하면 회원들이 그중에서 고르기도 한다. 한 달 동안 각자 선정된 시집을 읽고 그중에 마음에 와닿는 시를 고른다. 내가 모임에서 처음으로 함께 읽은 시집은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택배로 왔다'이다.

첫 모임에 가기 전 소개팅을 앞둔 것 마냥 설레었다. 마침 참여한 모임 장소는 얼마 전 이사한 회원의 집이었다. 평소에는 동네 책방에서 모임을 갖지만 특별한 경우 회원의 집에서 열기도 한다. 시를 읽는 분들이라 그런지 기존 회원분들 모두 따뜻한 말과 웃음으로 살갑게 대해주셨다. 어색함 없이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처음 온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 덕분이었다.  
   
모임은 먼저 오는 사람 누구든 함께 차와 다과를 준비하고 편안하게 한 달 동안의 근황 토크를 주고 받는다. 그리고 시집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을 나눈다. 본격적인 시 읽기의 진행 방식은 각자 마음에 들었던 시를 먼저 얘기한다. 예를 들면 정호승의 시집에서 나는 158쪽의 수의를 골랐다. 내가 시를 낭독하고 선택한 이유를 얘기하면 회원들도 그 시에 관한 느낌이나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혼자 이해하기 어려웠던 시도 함께 얘길 나누다 보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름대로 받아들였던 시에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더하면 공감대가 형성된다. 시를 빌어 옆에 앉은 이들의 생각과 감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헤아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두 함께 시를 낭독하면 한 편의 시 읽기가 마무리된다. 이런 방식으로 매월 참석하는 회원 수 대로 8~10편의 시를 함께 나눈다.     

나는 여섯 권의 시집을 읽었다. 12월에 읽은 '인생의 역사'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겪은 시에 그의 탁월한 해설이 곁들여진 시화집이다. 회원들은 그의 매력에 흠뻑 빠져 단톡방에 매일 필사를 해서 올리기도 했다. 1월에는 문단계의 아이돌이라는 박준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3월은 어머니에 대한 시와 글 '마음과 엄마는 초록이었다'를 읽었다.   
   
루이즈글릭의 야생붓꽃은 봄에 어울리는 시집이었다. 야생붓꽃은 1993년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받은 시집으로 올해 재출간되었다. 아무래도 번역본이라 처음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같이 읽기'를 통해 시인이 말하는 식물의, 인간의,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늘도 나는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창포꽃 봉오리를 쓰다듬으며 야생붓꽃이, 잡초를 뽑으며 그녀의 시 '개기장풀'이 떠 올랐다.   
  
▲ 시집 신이인의 검은머리 짐승 사전과 박준의 시집
ⓒ 도희선
 
5월의 시집 '검은 머리 짐승'은 역대급으로 어려웠다. 미래파 시인 신이인은 94년생이다. 스물일곱. 시에 나이가 상관있으랴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시모임 회원은 30대 한 명. 40대, 50대, 60대로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모임 전부터 단톡방에 이해하기 힘들다는 글이 올랐다.

나 역시 책장이 넘어가지 않아 몇 번을 뒤적여도 와닿는 시가 없었다. 하나 둘 회원들이 도착할 때마다 시가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고 울상이었다. 하지만 리더답게 열심히 공부해 온 H의 차분하고 통찰력 깃든 해설과 시인의 감성과 생각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한 회원들 덕분으로 오늘도 성공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의 눈과 목소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시를 함께 읽는다는 것은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고 소통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고,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도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고 했다.
     
마음이 시린 날 따뜻한 시 한 편은 온기를 나눠주고, 슬픔이 먹구름처럼 몰려와 먹먹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는 날에도 시는 위로가 된다. 아! 시를 읽는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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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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