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연산군이 쉽게 몰락한 결정적 이유

김종성 2023. 5. 1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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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꽃선비 열애사>

[김종성 기자]

하숙집 이화원에서 인연을 맺은 꽃선비 3총사는 이화원 주인 윤단오(신예은 분)와 함께 조정 관료들의 협력을 받아 폭군 이창(현우 분)을 몰락시켰다. 이들이 반정을 성사시키면서 SBS 드라마 <꽃선비 열애사>는 막을 내렸다.

드라마 속의 반정은 수월하게 성사됐다. 이창의 어머니인 대비(남기애 분)도 정변을 승낙했고, 대궐문도 어렵지 않게 열려 쿠데타군의 진입을 도왔다. 경호 무사들만큼은 비교적 충실히 이창을 지키려 했지만, 대세를 막지는 못했다. 결국 이창은 삼총사의 일원이자 전직 세손인 조카 이설(려운 분)의 검을 끌어당겨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싱거웠던 연산군의 몰락
 
  SBS <꽃선비 열애사> 한 장면.
ⓒ SBS
 
대표적 폭군인 조선 연산군은 드라마 속의 이창보다 훨씬 쉽게 권좌를 내줬다. 연산군을 실각시키고 중종을 옹립한 1506년 중종반정은 매우 싱겁게 성사됐다. 물론 반정 자체는 치밀하게 준비됐다. 하지만 연산군이 폭군이었던 것에 비하면, 그의 몰락은 의외로 싱거웠다.

중종반정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한 음력으로 중종 1년 9월 2일자(양력 1506년 9월 18일자) <중종실록>은 정2품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이 반정 세력을 이끌고 창덕궁으로 나아가던 전날 밤 11시경 상황을 묘사한다. "문무백관과 군인·백성들이 분주히 달려와 거리를 메우고 길을 막았다"라고 전한다.

반정세력이 정부군에 쫓기고 있었다면, 한성부(한양은 별칭) 주민들이 한밤중에 거리로 쏟아져나와 한가롭게 구경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연산군 조정의 샐러리맨인 문무백관들 역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정군이 몰려온다는 소문은 도성 백성뿐 아니라 궁궐 병사들까지 동요시켰다. 폭군 이창에게 비교적 의리를 지킨 <꽃선비 열애사> 속의 궁궐 무사들과 달리, 연산군을 지키던 군인들은 임금을 내팽개치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궐내에 입직한 여러 장수들과 군사, 도총관 민효증 등은 변을 듣고 궁궐 도랑의 수채 구멍으로 먼저 나갔다"라고 위 실록은 말한다. 군주의 경호 무사들에게서 볼 수 있는 사명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연산군을 보좌하던 입직 승지들도 마찬가지였다.

궁궐 곳곳의 대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달랐다. 이들은 수채 구멍으로 기어나가지 않고, 담장을 뛰어넘어 달아났다. 그래서 "궐내가 텅 비게 됐다"고 실록은 말한다.

'텅 비다'에 쓰인 한자는 일공(一空)이다. '텅 비다'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늘의 창공을 가리키기도 하고, 만물은 공(空)이라는 불교 교리를 설명할 때도 쓰이는 글자다. 궁궐이 얼마나 말끔하게 비워졌으면 이런 표현을 썼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SBS <꽃선비 열애사> 한 장면.
ⓒ SBS
 
그런 속에서 반정군도 여유를 부렸다. 연산군을 잡기도 전에, 전동·김효손처럼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과 그 식솔들을 체포해 공개 참수형을 집행했다. 나중에 해도 될 일을 이 긴박한 순간에 했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정군이 연산군의 항복을 받는 장면도 그랬다. 쿠데타군은 창덕궁에 사람을 보내 "정전(正殿)을 내주고 옥새를 내늫으라"고 연산군에게 요구했다. 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정전에 해당하는 창덕궁 인정전을 내달라는 요구는 한마디로 방 빼고 나가라는 의미였다. 연산군은 자기 죄가 중대해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좋을 대로 하라는 답을 보냈다.

이때 연산군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한성부 좌윤(서울시 부시장)을 지낸 윤기헌(1548~ ?)의 <장빈호찬>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정변 소식을 들은 연산군은 처음에는 활과 화살부터 찾았다. '지하 벙커'로 들어가 군대를 지휘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무기부터 찾았던 것이다. 그만큼 당황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은 "활과 화살을 가져와!"라고 고함쳤다. 하지만, 갖다주는 이가 없었다. 다들 수채구멍으로 기어나가거나 담장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실망한 연산군은 생각을 바꿨다. 중전에게 "우리 함께 나가서 빌어봅시다"라고 제안했다. 중전은 "이렇게 된 마당에 빌어본들 뭐하겠습니까?"라며 "그냥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이시지요"라고 권유했다.

역대 군주들의 이야기를 수록찬 관찬 서적인 <국조보감>에 의하면, 잠시 뒤 승지와 내시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들은 "국새를 내주고 집무실을 비우시랍니다"라며 반정군의 요구를 전했다. 연산군은 "내가 내 죄를 알지"라며 국새를 내주고 순순히 방을 빼줬다. 중종반정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 서쪽의 교동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폭군 연산군은 백성과 신하들에게 무서운 이미지를 연출했지만, 결정적으로 허술한 데가 있었다. 왕권 유지에 필요한 집중력은 매우 약한 편이었다. 집중력이 약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음주가무를 즐기는 연회에 빠져 허송세월하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족의 생활 공간인 궁궐 안의 내전(內殿)을 마치 룸살롱이나 노래방처럼 활용하곤 했다. "내전에서 연회를 벌였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연산군 11년 1월 22일자(1505년 2월 25일자) <연산군일기>는 연회 때 벌어진 어이없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연회에 취한 연산군의 최후

연산군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한 사헌부 집의 유경(柳坰)은 이 자리에서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왕이 시켜서 '마이크'를 쥔 그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겨우겨우 노래를 불렀다. 보다 못한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유경을 끌어내린 뒤 이조판서 김수동을 나무랐다. "너는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어찌 이런 사람을 집의로 삼았느냐?"고 힐난했다.

사헌부는 오늘날의 검찰청과 유사했다. 유경은 검사 비슷한 역할을 했다. 연산군은 김수동을 향해 '인사 전형을 담당하는 부서에 있으면서 노래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헌부 집의로 기용했느냐?'고 나무랐다. 검찰청 본연의 기능을 무시하는 연산군의 시각이 드러나는 엉터리 질책이었다.

'검사'의 노래솜씨에 실망한 연산군은 자신이 직접 흥을 돋우기로 결심했다. 위 실록은 김수동을 나무란 직후의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연산군이 이렇게 했다고 묘사한다. "뒤이어 직접 북을 두드리며 즐기다가 밤이 다할 무렵에야 파했다." 

그날 연회에 참석했던 유경과 김수동은 이듬해 중종반정에 가담했다. 함께 마시고 노래하던 사람들도 쿠데타에 참여했으니, 잦은 연회로 집중력이 떨어져 신하들의 이상한 낌새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을 몰아낸 세력은 야권이나 재야 세력이 아니었다. 민중 속의 혁명군도 아니었다. 연산군 정권에서 녹봉을 받던 박원종 같은 사람들이었다. 연회에 취해 신하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 줄도 모르고 있다고 화를 입었던 것이다. 중종반정이 <꽃선비 열애사>의 반정보다 싱겁게 끝난 데는 폭군 연산군이 겉으로만 강력해 보일 뿐 실제로는 집중력이 약했던 것도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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