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 대만 환도, 드디어 최남점에 도착하다

최늘샘 2023. 5. 1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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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방랑기45] 나의 대만 은인들

[최늘샘 기자]

대만 자전거 환도 22일째. 5일간 타이난의 180위안(한화 약 7700원)짜리 싱글룸에서 5일, 가오슝의 도미토리에서 하루를 지내고 오랜만에 텐트에서 아침을 시작한다. 여기는 핑둥현에 속한 인구 5만 명의 소도시 차우저우(Chaozhou). 어젯밤 편의점에서 만난 중학생들에게 캠핑할 만한 장소를 묻자 인근 공원 잔디밭을 추천했다.

대만 13개 현(縣) 중 최남단 핑둥현에서도 남쪽 땅끝에는 어롼비 곶(Cape Eluanbi)과 대만최남점(Taiwan southernmost point, 最南點)이 있다. 지도를 살펴 보니 자전거로 거기까지 가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할 때 어려운 길로 산맥을 넘어야 한다.

최남점을 포기하고 핑둥 중간 지점에서 기차를 타고 동쪽으로 건너뛰어 다시 자전거를 타고자 했던 마음은 편안한 숙소에서 며칠을 쉬는 동안 달라지고 말았다. 수많은 자전거 환도 여행자들이 저마다 뿌듯한 표정으로 도착해 사진을 남기곤 하는 그곳에 나도 가보기로 했다.
 
▲ 대만 자전거 여행자의 지도 대만을 여행하며 종이 지도 두 장을 사용한다. 왼쪽 지도는 지명과 도로, 산인지 평지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오른쪽 지도는 기차 노선을 확인하는 용도다. 대부분의 기차역에 와이파이와 전기, 정수기가 있어서 기차를 이용하지 않을 때도 기차역에 종종 들르곤 한다.
ⓒ 최늘샘
대만의 4, 5월은 무덥고 습했다. 종종 폭우가 쏟아졌지만 다행히 자전거를 달릴 때 큰 비는 만나지 않았다. 무더위를 피해 밤중에 자전거를 탈 때면 미친 듯이 짖으며 달려드는 개들에게 쫓기는 곤욕을 치렀다. 더위와 들개들과 모기떼가 주춤하는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자전거를 달리기 가장 좋은데, 그럴 때면 해는 왜 그리 빨리 떠오르는지 여섯시, 일곱시면 이미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차우저우 편의점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새벽 다섯시부터 자전거 페달을 젓기 시작해 린빈을 지나 팡샨을 지나 태양 아래를 달리고 달렸는데 아직도 최남단은 멀기만 하다. 오후 세시, 또 하나의 언덕을 넘고 수평선이 보이는 공원 벤치에 쓰러지듯 누웠다. 힘들다는 생각도 슬프다는 생각도 아무 생각도 없는데, 눈가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 한 방울이 맺힌다.
 
▲ 대만 자전거 여행 대만 남부 핑둥현 최남점을 찾아 가는 길. 최남단을 찾아 가는 수많은 차량과 오토바이가 달리는 도로를 따라 끝없는 수평선이 이어진다.
ⓒ 최늘샘
스마트폰 지도 앱을 열어 거리를 확인해보니 이동 거리는 57킬로미터, 소요 예상 시간은 불과 2시간 56분. 밥 먹은 시간, 쉬는 시간을 넉넉하게 빼면 자전거를 탄 것만 여섯 시간 정도. 한 시간에 9.5킬로미터를 이동했다.

자전거 평균 시속이 12킬로미터라는데, 구글지도의 속도 기준은 자전거 선수에게 맞춰져 있는 걸까. 내 자전거가 조그만 미니벨로라서 유난히 느린 걸까. 그렇게 땀을 흘리고 애를 썼는데 언제나 속도는 기대보다, 욕심보다 더디기만 하다.

느리게 더디게 마침내 도착한 최남점

저녁 8시 20분. 타이완 최남단 핑둥현 헝춘진 컨딩국립공원 지역에 도착했다. 번쩍대는 리조트와 호텔들, 도로를 따라 기나긴 야시장이 이어지고 대만 각지,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왁자한 저녁을 맞이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캠핑할 장소를 찾아 헤매는 땀에 전 여행자 신세.

게다가 22일 동안 잘 버텨준 내 자전거는 처음으로 문제가 터졌다. 잠시 세워둔 사이 강풍에 쓰러졌는데 그때 뒷자리 짐받이의 나사 한쪽이 빠졌는지 단단히 실어둔 배낭이 오뚜기처럼 데롱거린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나사 대신 케이블 타이로 응급처치를 하고 휴양지를 벗어나 외딴 곳으로 향한다.
 
 대만 최남단 핑둥현 헝춘진 컨딩국립공원 휴양지 모습
ⓒ 최늘샘
거대한 바다에서 여린 땅끝으로 비바람이 몰아친다. 동쪽은 태평양 루손해협, 서쪽은 대만해협, 남쪽은 남중국해인가. 커다란 바다들이 만나는 곳이니 바람이 미친듯이 부는 건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배와 사람들, 세계의 역사가 이곳을 지나갔을까. 1882년에 밝혀진 어롼비 곶의 등대는 지금까지도 대만에서 가장 밝은 등대로 '동아시아의 빛'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어롼비 공원 화장실 옆 잔디밭에는 기적처럼 수도꼭지 하나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드리고 후다다닥 땀에 전 몸과 옷을 씻었다. 오늘의 이동 거리는 88킬로미터. 이번 여행에서 가장 멀리 이동한 날이다. 느리니 더디니 힘드니 지치니 해도 결국 이곳까지 와 버리고 말았다.
    
새벽 세시, 강풍에 휘청대는 나의 20달러짜리 텐트에 누군가 손전등을 비추었다. 잠시 무서웠지만 살펴보니 대여섯명의 관광객들. 유명한 어롼비 등대를 촬영하러 온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다.

다시 잠자기는 글렀으니 어롼비 공원을 나와 지도를 따라 최남점 기념비를 향해 밤길을 더듬는다. 최남점에서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기념비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모기들과 새들과 함께 파도 소리를 들으며 태양을 맞이한다.  
 
 대만 핑둥현 헝춘진 컨딩국립공원 대만최남점 기념비
ⓒ 최늘샘
타이마리와 타이둥의 은인들 

대만 동쪽으로 가는 기차가 닿는 팡샨까지 다시 북쪽으로 47킬로미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오지 않았다면 나중에 조금은 아쉬웠겠지. 안 하고 후회하기보다는 하고 후회하자고 여행자 친구가 그랬지. 최남점 마을에서 등교하는 학생들과 함께 승차한 완행버스는 다행히 팡샨까지 내 자전거를 실어 주었고 추가 요금도 받지 않았다. 팡샨에서 타이마리까지 깊은 터널과 산맥을 가로질러 기차는 서부에서 동부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대만 서부는 이모작이 가능한 평야 지역이고 중부와 동부는 3000미터 이상의 고산 봉우리가 240개나 되는 높은 산맥으로 이어진다. 2350만 대만 인구의 대다수는 서부에 거주하고 타이베이, 가오슝, 타이중, 타이난 등 대도시도 모두 서쪽에 자리한다.

동부에서 가장 알려진 화롄시와 타이둥시의 인구는 10만 명 남짓이다. 먼저 대만을 일주한 여행자 친구는 동부는 심심하니 서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조언했다. 서부는 인구가 많은만큼 도로도 복잡하지만 동부는 한 줄의 해안도로가 언덕과 산, 절벽을 따라 이어진다. 옆에는 태평양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지만 자전거를 끌고 산길을 오르는 몸에선 땀이 줄줄 흐른다.
 
▲ 대만 환도 자전거 여행 중 동부 풍경 타이마리에서 타이둥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풍경
ⓒ 최늘샘
'자전거 여행자의 천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만은 자전거 도로와 교통 체계가 잘 갖춰져 있지만 현지인들은 자전거보다는 오토바이를 훨씬 많이 타고, 자전거 가게는 큰 도시에서나 볼 수 있었다. 나사 대신 케이블 타이로 고정한 짐받이는 튼튼하지 못해서 배낭이 자꾸만 한쪽으로 기운다.
타이마리 읍내의 오토바이 가게에 들어가 손짓 발짓 하며 도움을 청했다. 첫 번째 가게는 실패, 두 번째 가게에서 너무나 친절한 사장님을 만났다. 말이 필요 없는 기술의 세계. 잠시 자전거를 살핀 후 뚝딱뚝딱 빠진 나사를 끼우고 이음매 부분들을 점검해 주셨다. 커다란 장애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환도 여행을 응원한다며 돈도 받지 않으셨다. 밀려드는 고마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너무 너무 감사해요, 라오반(老板, 사장님)! 덕분에 무탈히 다시 여행길을 이어갈 수 있겠어요.
 
 타이마리 오토바이 가게 사장님 부부
ⓒ 최늘샘
짐받이를 수리 받고 나니 의욕이 넘쳐서, 아리산 2200미터 고지에서 내려올 때 헐거워진 브레이크 수리를 직접 시도했다. 숙소에 머물 때 미리 유튜브로 수리 영상을 봐두었는데 실제와는 다르다. 앞뒤 브레이크 왼쪽 오른쪽 나사가 왜 이리 많은지 꽉 조으면 브레이크가 바퀴에 닿아 자전거가 나아가지 않고, 느슨하게 풀면 브레이크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내리막길에서 위험해진다.

풀었다 조았다 적절한 균형을 맞추느라 자전거에서 몇 번을 내렸는지, 게다가 동해의 맞바람은 왜 그리 거센지, 평소의 3분의 1도 이동하지 못했다. 브레이크 수리 기술을 몸으로 깨달으며 대만 동부를 나아간다.

타이둥에서는 또 어디서 캠핑을 해야 하나. 공원을 서성이는 나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는 아저씨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구했는데 너무나 친절하신 분이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텐트 칠 장소를 알려주셨다. 어렵고 막막할 땐 도움을 구하자고 마음 먹는다.

"여행자는 가장 서툰 짓을 가장 능하게 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다던대. 그런 특권을 많이 누리다 오면 좋겠네." 동생의 응원도 다시금 떠오른다. 몸은 오래 전 어른이 되었지만, 낯선 여행길에선 다시 길도 글도 말도 모르는 아이같은 존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무한한 도움을 받으며 나는 오늘도 길을 가고 있다.
 
 타이둥 공원에서 만난 고마운 타이둥 시민
ⓒ 최늘샘
 
▲ 타이둥 캠핑 타이둥의 감사한 시민분이 알려주신 캠핑 장소에서
ⓒ 최늘샘
 
▲ 대만 자전거 환도 대만 남부 핑둥현 최남점을 찾아 가는 길. 최남단을 찾아 가는 수많은 차량과 오토바이가 달리는 도로를 따라 끝없는 수평선이 이어진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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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연재한 아메리카, 아라비아, 아프리카 여행기는 책 <지구별 방랑자>(2022, 인간사랑)로 출판되었습니다. 70여 군데 출판사를 돌고 돌아 마침내 출판된 책을 많은 분들이 읽고 공감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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