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게 칼 가는 기술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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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기자]
2주 전, 금천구 독산3동 주민센터 안내판에 이색적인 소식이 떴다. 칼갈이 수리를 무료로 해준다는 내용이다. 말로만 듣던 칼갈이 봉사자가 우리 동네에도 온다는 것이다.
▲ 칼갈이 수리현장 |
ⓒ 이혁진 |
칼갈이 무료 수리 현장
17일 오전 10시 주민센터 앞에 마련된 행사장소를 찾았다. 벌써 10개 칼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문지에 싸여 펼치지 않은 칼까지 포함하면 20개는 넘어 보였다. 작업을 시작한 지 1시간도 안돼 벌써 삼십여 개의 칼이 줄을 섰다. 칼 수리를 맡기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50~60대 주부들이다. 현장의 작업을 보고 칼을 가져오는 사람도 많아 12시쯤에는 수량이 50개에 육박했다.
김은태(65, 시흥동) 칼갈이 봉사자는 본격적인 작업을 하기에 앞서 칼에 순번을 매겼다. 어느 집이든 놀고 있는 칼이 한두 개쯤 있다. 그렇다고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이런 칼들을 쓸모 있게 새 것으로 만들어주는 게 김씨의 일이다.
대부분 집 주방에서 쓰는 칼과 과도를 가져왔다. 김씨는 이날 작업할 양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며 오전 10시 정각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작업은 오후 3시까지다).
칼 수리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다. 숫돌에 칼날을 비비면 들리는 '슥슥', '삭삭' 소리가 주변의 소음을 삼키고 있었다. 부지런히 날을 만지며 손놀림 하는 김 씨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작업은 보통 한 개 칼에 10분 정도 걸린다. 과일 깎는 과도는 5분 전후지만 부엌칼은 10분 정도, 어떤 것은 30분 정도 걸리는 것도 있다. 이른바 '이빨'이 다 빠진 칼은 먼저 그라인더 기계로 다듬고 숯돌에서 다시 날을 세워 '새 칼'로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이곳에 가져오는 칼들은 대부분 스테인리스 재질로 쉽게 무뎌진다고 한다. 날이 오래 가는 무쇠칼이 좋은 칼이다.
김씨의 칼갈이 봉사는 4년 전부터 시작했다. 과거 식당을 오래 운영했다. 결국 사업을 접고 빈털터리가 됐다. 몸도 망가지고 가족과도 헤어졌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있을 수만 없었다. 김씨의 처지를 알고 도와주는 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도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러다 스님이 '무재칠시'에서 돈 없이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것도 훌륭한 보시라는 말에 착안했다. 자신이 아는 게 칼 가는 기술 밖에 없는데 이를 활용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식당 하면서 칼을 다루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보고 한 번 갈아준 게 인연이 됐다. 이를 계기로 입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주일에 관내 시흥동 등 지역 봉사 이외에 아동급식센터나 봉사단체 식당을 찾아가 칼을 갈아주고 있다. 요청이 오면 그라인더, 무거운 숫돌 3개 등 부대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달려간다. 집에 있는 것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는 것이 좋고 행복하단다.
재능 기부하는 새로운 삶 부러워
▲ 김은태 칼갈이 자원봉사자 |
ⓒ 이혁진 |
▲ 칼갈이 그라인더 |
ⓒ 이혁진 |
작업할 때의 신중한 모습과 달리 작업을 마치고 날 세운 칼들을 바라보는 김씨의 얼굴은 편하고 환해 보였다. 그에게 올바른 칼 사용 방법과 팁을 물었다. 칼을 무디게 하는 딱딱한 물건에는 무조건 칼을 대지 말란다. 칼을 한번 제대로 갈면 가정에서는 2년 내지 3년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요새 젊은 사람들은 다시 쓸 수 있는 칼도 마치 물건 버리는 식으로 취급하는 데 조금은 아쉽다고 말했다.
독산3동 양재호 주민자치회장은 "사실 김씨는 금천구 여러 곳에서 봉사를 오래 하셨는데 우리 동네에 늦게 모셨다"면서 "시도 때도 없이 부탁을 드려도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는 마음씨 고운 분이다"라고 칭찬했다.
독산3동에 사는 주부 박영순(60)씨는 "어렸을 때 동네를 찾아다니며 칼을 갈아주던 아저씨들이 떠오른다. 집에서 숫돌을 이용해 갈기도 하지만 장인의 손을 거친 칼은 어딘가 다르고 비교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김씨는 이렇게 칼갈이 수리 지역봉사를 하는데 하루 작업하면 하루 이틀 정도는 어깨와 손목이 뻐근하다고 한다. 다소 힘들어도 자신을 반겨주고 찾아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사는 이유와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자기가 하는 봉사에서 삶의 희망과 행복을 찾은 김씨는 잃었던 건강과 무엇보다 웃음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봉사하는 삶이 말처럼 쉽지 않다. 김씨는 기력이 다할 때까지 자신이 받은 주변의 도움에 보답코자 몸으로 하는 칼갈이 보시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
필자는 김씨의 재능기부하는 모습에서 새 삶을 꿈꿔보기도 한다. 은퇴 이후 마냥 불만 가득한 나날을 보내는 내가 잠시 부끄러웠다. 기술을 배워 봉사하는 걸 고민하는데 문득 그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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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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