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명함', 토박이 인쇄인과 교포 청년 개발자의 협업

최대혁 2023. 5. 1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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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인쇄센터 일지] 국보사 이해욱 대표와 뉴버전 조준걸 대표 인터뷰

문화 기획을 했던 사람이 '인쇄인들을 위하고 시민들에게 인쇄문화를 알리기 위한' 서울인쇄센터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용역으로 공공 기관을 운영하면서 공간을 꾸리는 일, 시민들을 대하는 순간들을 소소하게 일지 형식으로 담아내고자 합니다. <기자말>

[최대혁 기자]

충무로 인쇄단지는 숲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요하지만 들여다볼수록 생존을 위한 치열한 역동을 발견하게 되는 숲처럼, 충무로 인쇄단지는 알면 알수록 기술과 환경의 변화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진화하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소개할 '스마트 명함'도 그런 일례이다.

스마트 명함은 종이 명함을 스마트폰에 가져다 대면 명함에 저장된 정보가 스마트폰으로 저절로 옮겨지는 명함으로 '근거리 무선 통신(Near Field Communication, NFC)' 기술을 이용한다. NFC 태그(칩)를 명함에 집어넣어 최대한 종이 명함의 질감을 유지하면서 정보통신 기술의 이점을 활용하도록 디자인되었다.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 스마트 명함 설명 종이 명함을 스마트폰에 갖다 대면 명함의 정보가 저절로 스마트폰에 입력된다. NFC 태그를 종이에 삽입한 방식으로 제작한다. (사진은 조준걸 뉴버전 대표의 시연 모습)
ⓒ 최대혁
원천 기술 자체는 낯설지 않다. NFC 기술은 이미 상용화된 기술이며, 인터넷에서 'NFC 명함'을 치면 여러 제품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제품보다 기자의 관심을 끈 것은 이 협업의 조합이다. 한쪽은 1989년 창업 이후 인쇄 단지에서 한 자리를 지켜온 60대의 토박이 인쇄인이고, 다른 한쪽은 20, 30대의 청년 개발자들이다. 협업은 캐나다 교포 2세 청년의 아이디어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실 인쇄라는 것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는 거잖아요. 종이 인쇄물의 느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종이의 한계를 뛰어넘는 디지털의 편리를 접목할 수 없을까 하다가 NFC를 연결고리로 이용하게 된 것이죠." (조준걸 뉴버전(주) 대표)

제품 출시를 한 달여 앞둔 지금이야 그저 솔깃한 아이디어로 보이지만, 개발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조준걸 대표가 협력할 인쇄 업체를 찾아 충무로 일대 인쇄 골목을 방문했을 때, 한국말이 서툰 그의 말에 선뜻 귀 기울이는 업체를 찾기가 힘들었다.

"제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명함 가게가 보이면 바로 들어갔어요. '난 이런 거 하고 싶은데'라고 하면 제가 한국말을 잘 못해서 그런 것도 있을 텐데, 거절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국보사를 만나게 되었어요. 이해해 주려고 했고, 완벽하게 이해해 줬어요. 그래서 같이하기로 했어요." (조준걸 뉴버전(주) 대표)

95퍼센트의 인쇄 업체는 말도 붙여볼 수가 없었고, 나머지도 단가가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충무로 일대 인쇄사들은 대부분 업체 간 거래를 하고 있다. 게다가 종사자가 2~3인인 업체가 대부분이라 주 거래처의 물량을 소화할 시간에 개인 개발자나 디자이너와의 상담을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준걸 대표와 뉴버전 직원들은 국보사의 이해욱 대표를 만나지 못했다면 성사되기 어려웠을 거라고 입을 모은다. 국보사의 이해욱 대표 역시 그의 부인 외에 직원 한 명으로 구성된 인쇄사라 개발이나 투자에 인색할 수밖에 없지만 선뜻 청년들을 맞아들였다.

그의 35년 인쇄 경력을 들어보면 그다지 새로운 일도 아니다. 흡사 급류와 같았던 인쇄 분야의 기술 변화에 발맞춰, 이해욱 대표는 끊임없이 국보사의 제작 시스템을 바꿔 나갔다. 1989년 지금 자리에 국보사를 세웠을 때 마스터 인쇄로 시작해, 1990년대 인쇄 호황기에는 옵셋 인쇄기를 들여놓았다가 지금은 디지털 인쇄로 시스템을 바꾸었다.
 
▲ 국보사 이해욱 대표 올해로 인쇄계에 들어온 지 35년차이지만 아직도 직접 제작을 진행하는 현역으로 실험과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 최대혁
기술 환경 변화에 따라 제작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비싼 것은 수억에 달하는 인쇄 장비는 일단 한번 들여놓으면 좀처럼 장비를 바꾸기도 어렵기도 하고, 공정에 따라 협력 업체가 달라지기에 인쇄사로서는 존폐의 위험성을 안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문제다.

가족뿐 아니라 생산 라인이 연계된 인근 거래처도 반대가 심했으나, 그럼에도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욱 대표는 말한다.

"반대도 심했죠. 주변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먹고 사는데 왜 굳이 돈 들여서 바꾸려고 하느냐고. 확신보다는 흐름이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변화된 기술에 대한 그의 평가는 냉정했다. 마스터 인쇄기에서 디지털로 넘어오는 동안 직원을 절반 이상 줄여야 했던 것이 아쉬운 점이라면, 오프셋 인쇄가 대량 인쇄 위주였던 데 반해 디지털 인쇄기로 소량 인쇄도 대응할 수 있게 되면서 고객이 다양해진 것이나, 오프셋 인쇄 시절 20%에 달하는 종이 손실률이 10% 이하로 줄어든 것 등은 이점으로 꼽았다.

"기술 장인을 존중해야 해요" 

도스 시절부터 컴퓨터를 쓰기 시작했다는 이해욱 대표에게는 '스마트 명함' 역시 자연스러운 변화의 연장선에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5개월 동안 개발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그에게 상당한 무리였을 터. 여기에는 조준걸 대표나 직원들의 정성도 주효하게 작용했다.

"저도 나이, 문화라든지 차이점이 많을 걸 알아요. 일단 나이 드신 분들이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잖아요. 그래서 나는 내 노력, 내 진지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받아주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뉴버전 조준걸 대표)

"사장님하고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다 보니 말도 잘 가려야 되고 사장님이 하시는 인쇄 용어도 잘 모르는 상황이 오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내다 보니 저희 아버지랑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뉴버전 김규백 실장)

청년 개발자들의 말끝에 이해욱 대표는 '청년들이 지혜롭다'고 부연했다. 두 세대의 협업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가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스마트 명함'으로 시작된 협력은 이제 다양하게 아이템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와인병을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증강현실로 와인의 역사가 영상으로 펼쳐지는 라벨지라든가, 작품이나 상품이 고유한 진품임을 증명하는 태그 등을 개발 중이다.
 
▲ 국보사와 뉴버전 직원들 왼쪽부터 국보사 이해욱 대표, 직원 유건숙 님, 뉴버전 김규백 실장, 조준걸 대표, 직원 황성안.
ⓒ 최대혁
 
이런 세대 간 이종 간의 협업이 촉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뉴버전의 개발자들에게 기존 인쇄업계의 장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었다. 많은 곳에서 퇴짜를 맞은 그였기에 다소 답변을 예상한 질문이었으나 전혀 다른 답변을 얻었다.

"저희 생각에는 인쇄 사장님들, 바뀔 필요 없어요. 우리가 오히려 다가가야 해요. 왜냐하면 이 사장님들 거의 30년 동안 혹은 그 이상 전문가잖아요.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들이죠. 이분들은 계속 장사가 잘 되니까 우리를 안 도와주셔도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respect(존중, 존경) 해야 해요." (조준걸 뉴버전 대표)

이국의 청년에게서 우리 기술 장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는 사뭇 감동이었다. 정작 우리 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존중은커녕, 재개발이다 뭐다 해서 이들의 설 자리도 점점 없어져 가는 상황을 이들은 어떻게 이해할까?

뉴버전과 국보사가 협업한 첫 번째 제품인 NFC 명함은 이제 한 달여만 있으면 시장에 출시될 계획이라고 한다. 우선은 기업 고객을 위주로 진행하고 점차 개인 고객으로 대상층을 넓힌다는 계획이다. 이질적인 두 영역, 두 세대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업의 결과물이 시장과 인쇄업계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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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같은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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