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시동거는 것처럼… 만성 우울증 환자 '의욕' 되찾는 법

김병수정신건강의학과 김병수 원장 2023. 5. 18.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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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의 우울증 클리닉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제공
우울증이 만성화돼 “집안에만 있다.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재미도 없다. 계속 이렇게 지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병원에 오게 됐다”고 호소하는 환자들을 종종 본다. 수 개월, 아니 일 년 혹은 그보다 더 길게 흥미와 관심이 사라지고, 무기력과 피로감과 함께 “몸이 무겁다. 물 먹은 스펀지 같다. 누워만 있게 된다”고 말하며 신체 활기가 낮아져서 사회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나 일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자기 방 누워서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며 하루를 보낸다. 심하면 “다른 식구들이 자고 있는 밤에 몰래 나와요”라며 가족과도 교류가 없어진다. 우울증 환자의 6~15%가 우울증이 장기간 지속되는 만성화된 경과를 걷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례들은 대부분 20~30대 청년에게 나타난다. 한창 일하고, 연애하고, 세상을 탐색하고, 도전해도 아까운 시기이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에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어진다. 각별한 의지을 짜내야만 진료 받으러 올 수 있기 때문에 의사로서도 책임감을 더 느낀다.

우울증이 만성화되면 주의집중력과 기억력 저하가 발생하는 등 인지 기능이 떨어지고, 열등감, 절망감, 일상적인 일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자살에 대한 생각도 잦아진다. 일을 시작하거나 유지하기 힘들고, 대인관계가 어려우니 연애조차 하지 않고 미혼으로 남는 사례가 흔하다. 이것이 고착화되면 성격과 우울증이 분리가 안 된다. “지금 이렇게 지내는 내 모습이 우울증 때문인가? 원래 나의 성격이었던가?”하고 혼란에 빠진다.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것만 갖고 희망을 가지려는 의지마저 포기하게 된다. 우울증이 오래 지속될수록 치료 반응이 좋지 않다. 스트레스를 받고 급성으로 우울증이 생긴 경우 보다 만성화된 우울증의 예후는 더 안 좋다.

“선생님, 저는 약을 쓰지 않고 상담만으로 치료하고 싶어요”라고 하거나 “약보단 제 의지로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고 하면 의사로서 고민스럽다. 환자 보호자가 “우리 아이 앞길이 창창한데, 지금부터 정신과 약을 먹이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다. 환자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만성화된 우울증이 해결되면 좋다. 1~2년 지속된 우울 증상이 항우울제 없이도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약물 없이 상담만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그런데 무기력에 1~2년 이상 시달린 환자와는 상담이 꾸준히, 장기간 지속되기 어렵다. 무엇보다 상담 치료만으로 우울증상이 유의미하게 개선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병원에 오기 전부터 수 개월 아니 수 년간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그것을 치료하는 데 또다시 그 정도의 시간을 써야만 한다면, 이런 치료를 효율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담 치료의 성과를 미리 가늠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만성화된 우울증 환자와의 상담 내용이 “과거에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 수 년 전에 그 문제가 나를 우울증 환자로 만든 거예요. 자존감이 낮은 건, 과거 때문이에요”라는 내용에 머물러 있다면 좋아지기 힘들다. 물론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도 필요하다. 우울이 일상화된 환자에게 무의식과 심층으로 파고들어 뭔가 실마리를 찾아보겠다고 하는 건 더 깊은 미로 속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상담이 반추를 자극하게 되고, 그것이 우울증을 강화시킨다.

만성화된 우울증은 약물치료가 중요하다. 항우울제와 항우울 효과를 강화하는 약제를 잘 조합해서 치료한다. 약물치료를 충분히, 적극적으로 하는 게 우선이다. 기분을 좋게 하는 세로토닌 활성화 단독으로는 효과가 부족하고, 활기와 의욕을 고취시키는 도파민이나 주의집중력을 조절하는 노르에피네프린 신경전달체계가 반드시 같이 활성화돼야 한다. 그래야 ‘반짝’하며 불꽃이 일기 시작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약물 치료는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항우울제라는 키를 돌리면 엔진룸에 불이 번쩍하고 들어돈다. 그리고 자동차가 앞으로 갈 수 있는 연료를 채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연료통이 바닥 났는데 차를 움직이려고 핸들을 아무리 돌려 봐야 소용이 없다. 기름통부터 채워야 한다.

약물치료로 기분과 활기가 개선되기 시작하면 행동 활성화로 일상에서 의욕을 되찾게 만들어야 한다. 기쁨과 숙달감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을 하루 일과에 통합해서, 약을 먹듯이 반복하는 것이다. 제때 일어나고, 제때 식사하고, 가볍게 산책하거나 동네 커피 가게에 들러 차 한잔을 마시고 온다거나, 침구를 정리하고, 빨래를 개는 것처럼 집안일을 하나 둘씩 해나가는 것도 치료에 도움이 된다. 물론 이런 걸 억지로 시킬 수는 없다. 환자의 내재적 동기 수준에 따라 적절한 활동 과제를 부여하게 된다.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자동차를 처음에는 뒤에서 밀어주는 것이 행동 활성화 치료라고 보면 된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지만, 으쌰으쌰하고 자동차를 밀다 보면 서서히 움직이고 시동도 잘 걸린다. 그리고 나중에는 움직이기 훨씬 수월해진다.

만성화된 우울증 환자가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도 있다. 그건 바로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결정하는 일이다. 삶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이건 의사가 대신해줄 수 없고, 그 어떤 멘토나 상담가도 대신해줄 수 없다. 대신해줘서도 안 된다. 자동차에 기름도 채워주고, 시동이 걸리게 도와주고, 그동안 녹슬어 있던 기어에 오일도 발라줬지만 핸들을 잡고 있는 운전자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자기 인생의 운전대를 잡으려고 하지 않으면 도와 줄래야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내비게이션을 제공해줄 수는 있겠지만 목적지를 대신 찍어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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