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왜 과거를 공부하는가
흔히 영국과 미국을 공통의 언어로 나뉜 두 나라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영국인과 미국인이 비슷해도 생활방식이나 가치관 등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은근히 크다. 과거 영국 유학 당시 영국과 미국 학생이 여러 이유로 서로를 놀리거나 의견 충돌하는 것을 보곤 했다. 으깬 감자 요리가 ‘mashed potatoes’(으깬 감자들)이냐 ‘mashed potato’(으깬 감자)이냐 만큼 대서양 혹은 식탁 양편의 논객을 자극한 주제는 군주제냐 공화제냐 문제다.
이 흥미로운 주제가 나오면 두 나라 차이도 배우고 영어 듣기도 연습할 겸 오가는 말에 더 집중했다. 그러다 적지 않은 영국 친구가 군주제를 진지하게 지지하는 모습에 놀라곤 했다. 현대 사회에 왕이 있음이 이상해 보여도 수백 년에 걸친 고민과 타협의 결과물인 입헌군주제를 부정할 수도 없고 일국의 대통령과 달리 영연방에서 영국의 군주가 담당한 오랜 역할이 있다는 것이 주요 논지였다. 이런 식으로 명쾌한 논리 대신 역사 수업이 답 없이 계속되던 토론을 끝맺어 줬다.
지난 6일 영국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이후 70년 만에 열린 행사인 데다 21세기 유럽에서 처음 열리는 대관식인 만큼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대관식이 아니라면 소수의 기억 속에 봉인되었을 수백 년 전통이 그 자리에서 재현됐다.
특별히 입헌군주제 지지 여부를 떠나 예식에 강하게 스며들어 있는 그리스도교적 상징과 메시지에 관심이 갔다. 물론 일회성 즉위식을 위해 투입된 엄청난 인력과 세금, 그리고 곳곳에서 열린 반(反)군주제 시위는 대관식 자체를 낭만화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속도와 효용성에 취한 현대인들에게 논쟁과 반발을 유발할 줄 알면서도 전통을 우직하게 붙잡는 모습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찰스 3세의 대관식은 ‘과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졌다. 인간에게 역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바쁘고 복잡한 우리 삶에서 역사를 중요시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고 때로는 큰 비용도 치러야 한다. 이때 비용이란 경제적 비용만이 아니라 사회적 비용까지 포함한다. 어떤 역사를 왜 기억하느냐의 문제는 공동체를 번영으로도 분열로도 이끄는 만큼 구성원 간의 토론과 합의를 요구한다. 때론 전혀 효용성이 없어 보일지라도 개인과 사회의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유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비극적 과거를 기억할 권리를 피해자에게 보장할 필요도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가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우리에게 비용까지 청구하다 보니 역사는 불편한 대상처럼 여겨지기 일쑤다. 각자 삶의 위치와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른 만큼 한쪽에서는 과거에 지나치게 묶여 있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과거를 덮어두고 미래로 나가자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특정 과거를 자기식으로 해석하려는 욕망에 역사책은 이념과 세계관 전쟁의 최전선이 된다.
하지만 역사에는 현대인의 잣대로 재단되지 않는 낯선 실재 그리고 나와 신념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로 가득하다. 과거를 과거로 대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는 ‘자기 비움’을 요구한다. 과거의 타자성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어야 오늘을 함께 사는 타자들에게도 마음을 열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전 영국 성공회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는 “역사 공부는 기도와 금식, 성찬, 설교 듣기 등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필요한 훈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어디선가 찰스 3세의 대관식을 놓고 영국인과 미국인 친구가 논쟁하고 있을지 모른다. 역사적 기억이 다르니 결론이 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토론을 통해 과거를 대하는 법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공유하지 못할 역사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돈독히 하고 더불어 사는 맛을 더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가 있기 때문이라는 뻔한 교훈을 익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Long Live the King’(왕께 만세)이란 말이 입에 잘 안 붙는 건 영국인도 마찬가지다.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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