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비 갈등에…서울 곳곳 신탁 방식 주목 [감평사의 부동산 현장진단]
서울 지하철 5호선 영등포시장역 3번 출구로 나와 3~4분쯤 걸으면 꽤 큰 사거리가 나온다. 영등포시장사거리다. 이곳에서 영등포시장역 3번 출구를 등지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눈으로 봐도 꽤 오래돼 보이지만 비교적 큰 상가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동남상가’다. 동남상가 뒤로는 더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아파트도 눈에 띈다. 1971년 준공해 이미 50년이 훌쩍 지난 동남아파트다. 동남상가와 동남아파트를 포함한 이곳 일대는 현재 ‘영등포1-11재정비촉진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최근 부동산업계에서 ‘영등포1-11구역’ 조합이 한국토지신탁을 정비사업 사업 대행자로 지정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11월 조합은 총회를 열고 사업 대행자 방식을 통해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조합 측은 올해 3월 한국토지신탁을 사업 대행자로 지정하고 본격적인 사업에 나섰다.
영등포1-11구역은 지난 2월 7일 열린 서울시 제1차 도시재정비위원회에서 주거비율을 연면적 50%에서 90%로 완화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재정비촉진계획변경안을 통과시키면서 사업성을 높였다. 조합과 한국토지신탁 측은 올해 건축심의 완료와 시공자 선정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신탁 방식 정비사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신속한 사업 진행이다. 조합 방식으로 진행할 경우 조합장 선출부터 조합원 의견을 모으는 일 등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 많다. 반면 신탁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 중인 신길10구역의 경우 사업 시행자 지정 3개월 만에 시공사를 선정했으며 지난해 11월 정비사업의 9부 능선 격인 관리처분계획인가를 받았다.
최근 부동산 시장 침체가 계속되고 공사비 인상으로 재개발·재건축 사업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신탁사를 찾는 조합이 늘고 있어 주목받는다.
신탁 방식 정비사업은 조합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히는 내부 마찰이 없는 만큼 사업에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지난해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올림픽파크포레온)이 조합과 시공사 간 갈등으로 공사가 장기간 중단되면서 신탁 방식은 정비사업 분야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성공 사례가 적고 공사비나 평형 배치 등 세부적인 문제에서 신탁사의 일방적인 의사 결정으로 주민과 갈등이 언제든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늘어나는 신탁 방식
전국적으로 10만가구 이상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국 약 130개 사업장에서 10만가구가 신탁 방식을 통해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올해 들어 서울에서 신탁 방식으로 재건축 추진을 결정한 정비구역이 여럿 있다. 관악구 신림1구역(4140가구), 영등포구 여의도 시범아파트(2472가구), 양천구 신월시영(3107가구),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996가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정비구역만 해도 1만가구를 훌쩍 넘는다.
이외에도 목동 재건축 단지 11곳은 신탁 방식에 대한 주민 의견을 받고 있다. 여의도 은하아파트 재건축추진위원회 역시 재건축 사업 추진을 위한 예비신탁사 선정에 나섰으며 구로구 구로우성아파트는 여러 신탁사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노원구 상계동에선 재건축 안전진단 문턱을 아직 넘지 못한 노후 단지를 상대로도 신탁사 설명회가 활발히 열리고 있다.
신탁 방식은 주민들이 직접 재건축·재개발 조합을 꾸려 사업을 추진하는 대신 부동산신탁사를 통해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신탁사가 사업비 조달부터 분양까지 사업 전 과정을 도맡는다. 2016년 3월 관련 법 개정을 통해 도입됐다.
신탁 방식은 신탁사의 탄탄한 자금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원활한 자금 조달과 사업 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최대 장점으로 꼽힌다.
조합이 없어 사업 진행 과정에서 불거지는 주민 간의 갈등으로 사업이 지연될 우려도 적다.
신탁 방식 정비사업은 조합을 아예 구성하지 않고 신탁사를 시행사로 선정해 시공사 선정 등을 맡기는 ‘신탁시행’ 방식과 조합을 설립하는 대신 신탁사에 자금 관리 업무 등을 맡기는 ‘신탁대행’ 방식으로 나뉜다. 두 방식 모두 자금 관리를 신탁사가 맡기 때문에 조합 임원의 횡령이나 배임 등을 막을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최근 신탁 방식이 주목받는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우선 사업 속도가 빠르다. 통상 재건축이나 재개발 등은 추진위 설립부터 조합설립, 사업시행인가, 관리처분인가, 이주와 철거, 분양까지 길게 10년 이상 내다봐야 한다. 신탁 방식은 추진위 설립부터 조합설립인가까지 3년가량 기간이 줄어들어 사업을 빨리 진행할 수 있다.
자금 조달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조합 방식은 사업 기간이 길어질수록 대출 규모가 크게 늘어난다. 조합 내부 갈등이나 시공사의 공사비 인상 요구로 사업이 길어지면 추가 비용 부담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둔촌주공 사태가 대표적이다. 반면 신탁 방식 정비사업은 신탁사가 직접 자금 조달을 책임진다. 자체 자금이나 신용 등으로 정비사업에 드는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다.
업계 한 관계자는 “신탁사가 정비사업을 이끌면 시행 방식은 최대 3년, 대행 방식은 최대 2년 사업 기간을 줄일 수 있다”며 “사업 속도를 내기 위해 인허가를 빠르게 받고 설계 등 각 단계에 필요한 자금을 적기에 투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탁사는 자체 사업비를 조달하기 때문에 제때 자금을 투입해 사업을 빨리 진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높은 수수료와 추가 비용 만만찮아
정비사업 조합과 공사비 갈등이 잦아지면서 건설사 사이에서도 최근 들어 비교적 사업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신탁 방식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금리가 높고 자잿값이 급등해 공사비는 앞으로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며 “아무래도 조합보다 협상력을 갖춘 신탁사를 통하면 적정 수준 공사비를 책정하기도 수월하고 사업 진행에 따른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물론 신탁 방식이 정비사업에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주의할 점도 여럿 있다.
우선 높은 수수료는 늘 거론되는 문제다. 보통 신탁사가 받는 수수료는 총 분양대금의 2~4% 선이다. 분양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도 적지 않다.
사업성이 좋은 지역일수록 신탁 수수료를 낼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곳곳에서 제기된다. 가령 강남이나 압구정 재건축 단지 중에선 신탁 방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탁 방식을 고려하는 조합이라면 해당 사업장 입지나 사업성 등을 면밀히 검토해 결정할 필요가 있다.
조합원과 조합장 갈등이 신탁 방식에서도 얼마든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신탁사가 주민 허락을 받는 과정에서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조합 방식과 똑같은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
제도적으로 여전히 미흡한 점도 생각해볼 부분이다. 현행법상 한 번 신탁사와 시행 계약을 맺으면 소유자 전원이 동의하거나 수탁사 귀책사유 없이 쉽게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
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소유자 만장일치 의결이 없으면 신탁 계약 해지가 사실상 불가능한 현재 구조가 개선돼야 신탁 방식 정비사업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될 것”이라며 “제도적으로 신탁사 태업을 견제하고 사업 지연이나 매몰 비용 책임 소재를 분명히 나눌 수 있는 표준계약서 약관 개정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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