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인프라'로 쌓은 건강보험 데이터, 보험 개발에 쓰일까
'취약계층 가입 거절' 등 우려로 무산
소비자·공급자·전문가 일제히 우려 표명
"공익 우선돼야…민간이 직접 데이터 구축해야"
"가명정보더라도 개인 특정 가능성 있어"
"취약계층 배제 우려도 있어"
보험업계, '지나친 우려'…가입 배제 어려워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검진에서 얼마나 많은 40대 남성이 만성질환을 진단받고, 암 검진에서 어떠한 사람들이 암을 진단받을까? 이 같은 자료들이 포함된 건보공단의 공공의료데이터를 받아 보험사들이 상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상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선행되지 못하면서 이 같은 구상이 현실화할 경우 수많은 부작용이 따를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1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는 이를 둘러싼 '건강보험자료 제공 가이드라인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의 쟁점은 과연 건강보험공단이 보유한 공공의료데이터를 민간보험사의 보험 상품 개발 등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지였다.
건강보험공단은 현재 국민건강보험법과 기타 법령에 따라 건강보험과 직접 관련된 가입자·피부양자 자격, 보험료 부과 내역부터 시작해 병·의원 등 진료 이력, 건강검진, 장기요양보험, 자동차보험 내용 등으로 사회·경제적 정보와 국민들의 진료 정보가 총망라한 빅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각종 국가승인통계와 주요 통계, 공공데이터포털 등을 통해 학계와 공공기관에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박종헌 건보공단 빅데이터운영실장은 이에 대해 "대부분 학술 연구로 민간 기업에 제공한 건 30건가량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2020년 데이터 3법(개인정보 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이 시행되면서 민간 보험업계는 2021년부터 가명 처리 후 '과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활용하겠다며 이들 데이터를 요구해왔다. 하지만 건강보험공단은 ▲취약계층 등의 배제 우려 ▲과학적 연구로 보기 어려움 ▲자료제공 최소화 위배 등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한화생명에서 관련 요구를 재신청하는 등 논란이 이어지면서 건보공단은 지난해부터 이해관계자의 의견 수렴을 통한 타협점을 찾고 있다.
이를 통해 지난해 10월 '민간보험사 데이터 개방 가이드라인 방향'을 도출하기도 했다. 우려를 대폭 반영해 ▲특정 집단·국민에게 불이익 주는 연구에 자료 제공 거부 ▲공단·학계의 공동연구 참여 ▲연구 결과 활용 시 공단의 사전 동의 획득 등의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이날 토론회에서는 '가이드라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근본적인 이의 제기가 나오는 등 득보다는 실이 클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김종민 대한의사협회 보험이사는 "가이드라인 (수립의 필요성에 대한) 찬반을 논하는 토론회라고 생각하고 참석을 결정했다"며 "가이드라인을 이미 제공하기로 한 것이라면 토론의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이어 가명 정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개인 특정화가 가능하다는 점에 대한 우려도 전했다. 그는 "가명성으로 모든 걸 커버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금융정보와 결합하면 사람을 특정할 수 있다"며 "가명이 가명이 아닌 만큼 (개인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정보를 가명으로 받아 보내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아리 한국데이터법정책학회 총무이사 역시 "가명 정보의 경우 추가정보의 사용, 결합 없이는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다"면서도 "공단이 관리하는 건강보험자료의 경우, 양이 방대하고 민감한 정보가 다수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민간 제공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윤 이사는 "재식별 가능성, 목적 외 이용, 제3자 제공 여부 등을 고려하도록 하는 점은 고무적"이라며 "사후 모니터링도 정보 제공이 결정됐을 때 안전한 활용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 단체 대표로 이날 토론회에 나선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도 "소비자의 입장에서 민감한 건강정보 활용에 대한 우려가 있고 보험회사 또한 뚜렷한 개선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조금 늦더라도 충분한 대응 방안과 준비를 갖고 제도가 시행됐으면 한다"고 짚었다. 정 사무총장은 "지금도 질병이나 유병 여부를 고지 안 했다는 게 보험 지급 거절의 주요 사유"라며 "민간보험사가 많은 정보를 갖고 상품 개발도 하고 활용을 하면 소비자를 선택하고 차별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도 우려를 전했다. 김명희 국립중앙의료원 정책통계지원센터장은 민간보험사의 공공의료데이터 제공 요청에 대해 '무임승차 행위'라고 지적했다. 김 센터장은 '공익'이 핵심이 돼야 한다며 "건강보험 빅데이터는 공적 재원으로 마련된 의료체계 인프라를 이용해 생성된다"며 "보험상품의 고도화를 위해 이러한 정보가 정말로 필요하다면 민간 보험사가 재원을 투자해 코호트를 구축하거나 주기적 서베이를 진행하는 등 직접 자료를 구축·분석하는 게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앞서 의료 정보 공유 제도가 도입되면서 개인이 건보 가입을 거부하고 사적 보험으로 전환하는 '옵트 아웃' 제도를 활용해 100만명 이상이 건보에서 탈퇴한 영국과 달리 한국에는 이 같은 권리도 없어 소비자의 권리가 침해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또한 국민의 손익 면에서도 "저위험군에 대한 보험료 할인은 다른 한편으로 위험률이 높은 가입자를 배제하거나 차등적으로 보험료를 인상하는 조치와 동전의 양면"이라며 "인센티브 프로그램을 통해 건강행동을 유도·촉진한다는 주장도 미래의 건강 증진을 위한 인센티브보다는 과거의 수행에 대한 징벌적 부담이 될 가능성이 크다"며 오히려 환자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고도 우려를 전했다.
노동·시민사회 단체에서도 토론회 취소를 요구하는 등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무상의료운동본부)는 이날 토론회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공의료데이터 제공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무상의료운동본부는 "민간보험사에 공공데이터를 넘겨주는 것 자체가 공익에 위배된다"며 "개인 동의 없는 가명 정보 제공은 위험할 뿐 아니라 이를 금지하는 건강보험법과 충돌하는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또한 이와 함께 전날 국회 상임위원회 법안심사를 통과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대한 의료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공공기관 정보까지 민간보험사에 다 퍼주려 한다"며 "건강보험 제도 자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도 언급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토론회장을 찾아 피켓시위와 함께 이 같은 입장을 재차 전하며 토론회 취소를 요구해 이날 토론회 시작이 40분가량 늦어지기도 했다.
보험업계, '지나친 우려'…가입 배제 등 어려워
보험 업계에서는 이 같은 우려에 대해 오히려 공공의료데이터를 고령자·유병력자에 대한 보험 상품의 개발에 활용한다면 사회적 효용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학계·의료계와 공동 연구체를 구성하고 건보공단에 가명 정보 데이터 사용을 재신청한 한화생명의 문병준 과장은 "보험이 필요하지만 기존 병력으로 인해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고객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보험사들이 가진 정보로는 유병자 상품을 개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며 "공공의료데이터를 이용해 정교한 분석을 통해 신규 위험률을 산출하고 그간 정보의 부족으로 만들지 못했던 신규 상품을 개발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취약계층에 대한 가입 배제 가능성에 대해서도 "공공의료 데이터는 가명 정보 데이터로서 분석해 산출된 통계 결과는 공급자의 검토 및 승인 아래 반출이 허용된다"며 "보험사가 개인을 특정하고 보험 가입을 막는 행위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정성희 보험연구원 연구조정실장도 "보험회사는 관계 법령에 따라 소비자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편향적인 상품 개발이 불가능하다"며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 될 수 있도록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이에 대해 "건전한 데이터 개방·활용이 지속 논의될 수 있도록 공·사보험 데이터 협의체(데이터 컨트롤타워)를 구성해 운영하고 국무총리 산하 '데이터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개방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도 제안했다.
이춘희 기자 spr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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