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의 표적 된 '자이니치 코리안'의 비극
[이준목 기자]
"인간성이란 인간끼리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인간임을 인정하고 만나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던 한나 아렌트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설명하며 내린 정의다. 하지만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악습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 tvN |
5월 1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99회는 '일본 우익의 먹잇감이 된 자이니치 코리안' 편을 통하여 일본에 거주 중인 재일 한국인의 가슴아픈 역사와 일본 우익들의 만행을 조명했다. 동아시아와 일본사 전문가인 박삼헌 건국대학교 일어교육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자이니치 코리안이라 불리는 재일교포는 현재 일본에 약 44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소수세력인 자이니치들은 일본에서 종종 차별과 폭언, 살해협박에 노출되어 고통을 받는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다.
일본의 극우파는 우익중에서도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며 천황을 위시하고 일제강점기 당시 침략을 부정하고 찬양하는 무리들이다. 이런 우익세력들은 역사적으로 100년에 걸친 시간동안 일본 내 자이니치들을 정치적 먹잇감으로 삼아 탄압하고 지금까지도 혐오과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
자이니치 코리안의 역사는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잇는 관부 연락선이 개통되면서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본 전역에 흩어지며 정착하게 된 것이 오늘날 자이니치 코리안의 시초다.
당시 일본에 건너간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어로 '3K'(힘들고, 더럽고, 위험한)로 불리며, 최하층 노동자 대우를 받았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야심을 구현하기 위한 전초 작업으로 도시 곳곳에 발전소와 철도공사를 진행했는데 위험하고 힘든 직업에 일본인 대신 조선인 노동자들이 투입됐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하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오는 숫자는 계속 증가했다. 조선인들은 가뜩이나 최악의 노동환경 속에서 일본 내에서는 일본인도 외국인도 아닌 '2등 국민'을 취급을 받으며, 임금이나 복지 등에서 차별 대우를 받아야 했다.
당시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은 먹을 것이 부족하여 일본인이 버리거나 가축사료로 이용하던 동물의 내장을 가져다가 먹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곱창 요리다. 일본의 곱창요리는 오사카 방언으로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호루몬(放る物)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의 최하층민으로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은 일본이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에 처할 때마다 희생양으로 이용당하기 일쑤였다. 1923년 9월 간토 대지진은 사망 및 실종만 10만 5천여명, 부상자가 10만여명 이상이 발생한 일본 역사상 최악의 지진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일본의 피해규모는 국민총생산의 약 1/3에 이르렀다.
사회가 불안해지고 불만이 높아지면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대상이 필요했는데, 당시 일본 사회에서 그 타깃이 된 것이 조선인들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혼란을 틈타 일본을 파괴하려 한다' '산업시설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근거없는 헛소문들이 만연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언론에까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괴소문에 격앙된 일본인들은 전국 곳곳에서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들은 나라의 적이니 전부 죽이자"고 선동하며 테러를 벌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 무고한 조선인들이 일본 각지에서 대량으로 학살당했다. 영화 <박열>에는 자경단들이 조선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말하게하여 조선인들을 판별하고 학살하는 장면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내 조선인들의 숫자는 오히려 계속해서 증가했다. 값싼 노동력이 절실했던 일본에 1930년대에 이르러 무려 42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유입됐고, 2차대전과 강제징용 시기에 접어든 1940년대에는 약 200만 명에 이를만큼 폭발적으로 불어났다.
그런데 1945년 일본의 패망은 재일 조선인들에게 또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패전으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되며 극심한 식량난에 처한 당시, 대도시 한복판에서도 굶주림에 사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일본에서는 식량부족의 원인을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 탓으로 돌리는 주장이 등장했다. 1946년말까지 귀국한 이들을 제외하고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은 약 60만 명 정도였다. 한 일본인 관리는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군 사령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식시량을 4배나 더 먹는다. 일본 내 식량부족의 원인은 조선인 때문'이라는 근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조선인의 귀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을 통치한 미 연합군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는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과 중국계 대만인을 해방민족으로 대우할 것과, 일본 국민으로 대우받고 보호받을 권리'를 보장했다. 그래서 일본은 법적으로 조선인들을 함부로 내칠 수는 없었다. 일본은 이에 또다른 꼼수를 만들어낸다. 1947년 일본국 헌법을 개정해 조선인의 신분을 '외국인'으로간주, 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인들의 신분을 '조선적'으로 표기하며 일반적인 외국인이 아닌 '무국적 난민'으로 전락시켰다. 이후 재일 후손까지 이어진 조선적 표기자는 2021년 기준으로도 2만 6312명이나 남아있다. 불분명한 국적표기로 인하여 조선적 유지자는 모두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이러한 차별 속에서도 자이니치들은 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자이니치들은 고국의 미래가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일본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자이니치들은 일본 사회에서 공직은 물론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는 것도 어려움을 겪으며 무국적자 취급을 받으며 고된 삶을 견뎌내야 했다.
일부 자이니치들은 생계를 위하여 도박과 범죄 등 어둠의 루트로 뛰어들었다. 자이니치들은 과거 전쟁물자로 사용되던 베어링을 이용하여 만든 기계 파친코로 도박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이는 소설과 드라마로 제작된 <파친코>의 배경이 됐다. 1950년대 일본 내 파친코 산업의 전성기에는 매출액의 70%가 자이니치 코리안의 소유라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조직폭력집단인 '야쿠자'에도 자이니치 코리안들이 다수 유입됐다. '살육군단'으로 악명을 떨쳤던 양원석을 비롯하여, 전성기에는 전국 21개 조직 중 자이니치 코리안이 이끄는 조직이 5개 이상이라는 소문도 나왔다. 가혹한 차별과 가난에 출셋길이 막힌 자이니치 코리안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직업이 바로 이런 음지의 업종들이었다.
반면 일부는 스포츠와 연예계에 진출하여 당당하게 두각을 나타냈다. 전설의 프로레슬러 역도산은 대배우로 꼽히는 마츠다 유사쿠(배우 마츠다 쇼타의 아버지) 등이 유명한 자이니치 코리안들이다.
그러나 역도산은 무시와 차별을 피하여 생전에 자이니치 코리안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도 자이니치설이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끝내 자신의 출생을 직접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밖에도 정체성을 숨긴 자이니치 예체능인들이 일본에서 다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자이니치 출신이 밝혀지면 방송출연이 불허되거나 결혼이 취소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현재도 일본 내에서 귀화하지 않은 자이니치 코리안이라도 90% 이상이 일본식 이름을 쓸만큼 정체성을 솔직히 밝히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50년 일본의 보수우파 정당이자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의 탄생은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1952년 미군이 물러나고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집권한 자민당을 통하여 우파 성향의 전범들이 정치권으로 다시 복귀하는 계기가 됐다. 자민당은 전후 재건과 경제극복 공약으로 일본인들의 민심을 샀다.
자민당 우파세력의 핵심인 기시 노부시케(56-57대 일본 내각총리대신)는 2022년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이자 A급 전범 출신이기도 하다. 미국과의 정치적 거래를 통하여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며 일본 정계에 복귀한 기시는, 총리로 집권하면서 전쟁에 적극가담했던 인물들을 내각에 대거 기용했다.
기시 내각은 눈엣가시였던 자이니치 코리안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북한과 함께 '북송사업(1959-1984)'을 추진했다. 1959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자이니치들은 일본 사회에서 빈곤과 차별, 실직으로 인하여 대거 생활보호대생자로 전락하면서 연간 17억엔(한화 136억)에 이르는 비용이 지출될만큼 일본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일본은 경제복구 정책을 위하여 사회발전의 방해요인으로 취급된 자이니치들을 몰아내고, 북한은 그만큼의 노동력을 확보한다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
자이니치 코리안들은 북송사업을 둘러싸고 북한에 우호적인 조총련과, 대한민국 측인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으로 입장이 갈라졌다. 일본 정부와 북한의 대대적인 선전으로 인하여 10만명에 이르는 자이니치들이 차별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북한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북송사업은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많은 자이니치들이 북한으로 건너간 후, 생계에 어려움을 겪으며 일본에서보다 더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며 자이니치 사회도 큰 변화를 맞이했다. 자이니치들은 한국 국적을 선택하여 '협정영주권'을 부여받거나 일본 국적 귀화, 기존의 조선적 유지라는 세 가지 선택지를 가질 수 있게 됐다. 당시 자이니치 60만명 중 약 33만 명이 이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은 멈추지 않았다. 협정영주권의 한계로 한국 국적의 자이니치들은 참정권이 없었고 공직 진출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으로 북한과 미국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며 동아시아에 다시 전운이 고조된 것은 일본에게도 충격을 가져왔다. 패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비로소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리기 시작했던 일본 사회에서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며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강력한 '반공주의'가 득세했다. 이러한 불안감 표출의 타깃이 된 것이 자이니치 코리안이었다.
우익세력들의 선동은 급기야 학원가로까지 옮겨갔다. 미디어에서 보도된 조선학교 여학생들은 특유의 치마저고리 옷차림이 북한 여성들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이유없이 일본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학 일쑤였다, 자이니치와 일본인 남학생들간의 갈등이 패싸움과 집단폭력으로 번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1979년에는 자이니치 코리안 중학생이던 임현일 군이 '조센징'이라고 비하하는 일본 학생들의 지속적인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여 투신자살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980년대에도 자이니치 학생들을 향한 테러가 잊을만한 속출했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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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버블경제가 붕괴되며 일본의 호황기가 막을 내리고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됐다. 그 사이에 고속성장을 거듭한 한국의 발전은 일본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했다. 또한 1995년에는 '한신 아와이 대지진'이 발생하며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 경기침체와 대재난이 초래한 위기 속에서 일본 우익들은 또다시 자이니치 코리안들을 표적으로 삼아 사회 불만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 일본 의원은 "대지진 화재가 자이니치 코리안들의 범행때문"이라는 근거없는 망언과 음모론을 일삼아 큰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일본과 아시아를 강타한 '한류'의 바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혐한'이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퍼지는 계기가 됐다. '욘사마' 신드롬을 일으킨 배용준과 <겨울연가>의 인기몰이를 시작으로, 카라-소녀시대 등 K팝의 약진까지 더해지며 한류 경제규모는 2003년 8600만 달러(1025억)에서 7년 사이에 2010년 3만1300만달러(약 3852억) 수준까지 급성장했다.
일본 우익세력은 이러한 한류의 영향이 커지는 데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젊은 우익 세력들은 '혐한'이라는 키워드로 결집하며 한국과 한국문화를 폄하하고 자이니치 코리안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100만부 이상이 판매된 만화 '혐한류'는 한국과 한류를 적대하는 일본 우익세력들의 시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주요 온라인으로 활당한 극우성향의 네티즌을 지칭하는 '넷우익'들은 조직적으로 자이니치 코리안들에 대한 근거없는 음해와 비방, 차별을 일삼고 있다. 넷우익을 중심으로 오프라인에서 결성된 '재특회(재일특권을 용납하지않는 시민모임)'는 일본내에서도 강성 극우단체로 악명이 높다. 창립자인 사쿠라이 마코토는 만화 <혐한류>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재특회는 자이니치 코리안들이 자이니치 코리안을 '총코(모자란 아이)'라고 비하하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집단시위 등을 통하여 자이니치가 일본내에서 차별받은 일이 없으며 오히려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도쿄 신오쿠보의 코리아타운에 있는 많은 상인들은 재특회의 표적 시위와 방해공작으로 영업에 막대한 피해를 보고 가게문을 닫아야 했다.
2010년대 아베정권의 등장과 일본의 우경화로 인하여 자이니치 코리안들에 대한 위협은 정치-사회적으로 더욱 심각해져가고 있다. 우익단체 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이에 가담했다. 후지주택이나 DHC 등 일본 유명 기업에서 한국인을 차별하고 위안부를 비하하며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헤이트 스피치'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민간에서 자이니치들을 타깃으로 한 테러도 연이어 속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되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들이 정착한 우토로 마을에서. 혐한 범죄자의 방화로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료들이 대거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자이니치 코리안 단체 사무실과 한국계 학교에서도 비슷한 범죄가 속출했다. 이로 인하여 '일본 내에서 혐한 범죄를 적용할 구체적인 법률이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2016년에 들어서야 '헤이트 스피치 대책법'을 마련하고 시행에 나섰다. 민간에서는 혐한 시위대에 맞서 반차별-반혐오 운동을 외치는 '카운터스'라는 조직이 탄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심있는 이들의 노력에도 아직 혐오시위와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처벌 조항이 미비하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박 교수는 강연을 마치며 "자이니치 코리안들은 시대의 결과로 만들어진 아픈 역사의 희생양"이라고 정의하며 "이들은 일본에서는 배척해야 할 외국인으로, 정작 한국에서는 같은 민족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그들이지만, 그들의 삶을 이해할 시간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라도 자이니치 코리안들의 아픈 과거를 우리 역사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아픔과 애환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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