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랐다...김환기 전모를 만나는 밀도 높은 전시

2023. 5. 1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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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호암미술관 김환기 회고전
한국적 추상미술 탐구한 120여 점
치밀하고 정제된 작품 배치 돋보여
"이번 생애 다시 보기 어려운 작품들"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김환기 회고전 '한 점 하늘-김환기'가 18일부터 열린다. 16일 언론공개회에서 대표작 중 하나인 '여인들과 항아리' 주변에 몰린 취재진. [ 뉴시스]
1950년대 김환기가 그린 삽화 스크랩북.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사진 호암미술관]
1956년 파리 첫 개인전 때 방명록. [사진 호암미술관]
1937년 당시 김환기 모습.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사진 호암미술관]

삼성문화재단(이사장 김황식)이 운영하는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김환기(1913~1974)의 대규모 회고전 '한 점 하늘-김환기( a dot a sky_kim whanki)'를 18일 개막한다. 호암미술관이 1년 반 간의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여는 첫 전시다. 김환기는 한국민 대부분이 이름을 알고 있는 근대화가 순위 3위 안에는 드는 화가다. 이중섭·박수근 다음으로 말이다. 그러나 김환기의 이름을 익히 아는 사람들도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의 작품을 실제로 많이 보았다고.

1913년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서 태어나 1974년 뉴욕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는 꽤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상당수 작품이 흩어져 있어 한자리에서 직접 보기는 쉽지 않았다. 부인 김향안(1916~2004 ) 여사가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워 좋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생애 전반을 아우르는 규모는 아니다. 1930~50년대 제작된 전반기 작품의 경우, 특히 개인 소장가들이 소장한 경우가 많다. 소장처는 뿔뿔이 나뉘어 있고, 작품 가격은 비싸고, 대여는 어려우니, 김환기의 작품을 그러모아 작가의 전모(全貌)를 가늠하는 회고전을 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호암미술관이 해냈다.

총 120여 점의 김환기 작품이 400평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전시는 김환기가 처음 일본에 유학 가서 본격적으로 미술가의 길을 걸었던 1930년대부터 시작된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학교에 다니며, 그는 당대 일본에서도 상당히 전위적인 미술단체에서 활약했다.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됐던 ‘창’, ‘론도’ 등이 이번 전시에 나와서, 김환기 이력의 화려한 출발을 알린다.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기관지에 “회화예술이 이 세상에 없었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던 시기 작품들이다.

6·25 전쟁 중에 그린 작품도 많이 나왔다. 전쟁 통에 부산 피란지에서도 뉴서울다방 같은 데서 개인전을 열었던 김환기가 아닌가. ‘뱃놀이’, ‘푸른 공간’과 같은, 짙은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 피란처의 결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폭양이 직사하는 생철 지붕 바로 밑, 큰 키로 인해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다락방에서 이런 작품을 그리며 김환기는 되뇌었다. “이런 것도 예술과 싸우는 것일까?”하고.


한국적인 소재, 신선한 어법


김환기, 론도, 1938_60.7x72.6cm_캔버스에 유채_국립현대미술관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사진 호암미술관]
김환기, 항아리, 1956, 100 x 81cm_캔버스에 유채_개인 소장_©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사진 호암미술관]
김환기, 달과 나무, 1948_73x61cm_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전쟁이 끝난 후 1956년 김환기는 파리로 가서 오히려 더욱 한국적인 소재에 매달렸다. 그는 달항아리와 매화와 학을 그렸다. 자세히 보면 우리의 전통 십장생도에 나오는 소재들, 구름과 돌과 산과 사슴도 즐겨 그렸다. 김환기는 이런 소재를 너무나도 새롭고 신선한 어법으로 다루어서, 이것들이 원래 한국의 전통에서 연원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유려한 선, 섬세한 색채, 풍부한 표면효과의 미묘한 변주! 새로운 표현 기법을 계속 실험해 가면서도, 김환기는 한국인으로의 자긍심을 잊은 적이 없었다. 1957년 프랑스 니스에서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해, 한국의 특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국의 하늘은 이 지중해보다 진하고 푸르다”고 말했던 김환기가 떠오른다. 참으로 시원해지는 그림들이다.

시간이 스며 있는 점화(點畵)


최근 리노베이션을 마친 호암미술관이 첫 번째 전시로 마련한 김환기 회고전은 자연과 전통에 천착하며 집요하게 한국적 추상미술을 추구했던 화가의 40년 예술 여정을 조망했다. [뉴시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_1970_232x172cm,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_©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사진 호암미술관]
김환기, 17-VI-74 #337_1974_86x121.5cm,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사진 호암미술관]
1963년 뉴욕에 정착한 이후 작품은 전시장 1층에 마련됐다. 결국은 하나의 ‘점’으로 귀결되는 김환기 작업의 여정이 그려진다. 점선·구성·재료 등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거치며, 그는 점차 점화(點畵)에 대한 확신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제목을 따온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무슨 선언처럼 전시장에 걸렸다. 김환기는 하얀 면포 그대로에 점을 오래 찍어 번지는 자연스러운 효과를 좋아했다. 거기에는 점점이 시간이 녹아 있고, 그래서 기다림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죽어간 사람, 살아있는 사람, 흐르는 강, 내가 오르던 산, 돌, 풀 포기, 꽃잎…실로 오만가지를 생각하며 점을 찍어간다”라고 그는 편지에 썼다.

아, 김환기의 마지막 작품들은 검다. 검은 점들이다. 화가들은 말년에 두 부류로 나뉜다. 죽기 전에 색채가 어두워지는 이들이 있는 반면, 다른 부류는 색채가 매우 화려해진다. 김환기는 전자에 속했나 보다. 전시장 벽에는 그가 죽기 한 달 전 쓴 일기 구절이 보인다.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죽음 앞에서 그가 깨달은 진실은 이렇게 단순했다. 우리는 모두 무한한 우주 아래, 하나의 ‘점’과 같이 유한한 존재일 뿐이란 것.

전시는 매우 찬찬히 화가의 생각과 그 결과물로서의 작품을 따라간다. 한 작품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그다음 작품이 너무 궁금해져서 조바심이 일만큼, 작품 배치가 치밀하고 정제돼 있다. 큐레이터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런 전시를 열기 위해서는 분명 훨씬 더 많은 작품을 놓고서, 공간 부족을 한탄하며 ‘빼기’를 하느라 애썼을 것이다. 그만큼 밀도가 높은 전시이다. 이것만 명심하자. 이번 생에 이 작품들을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 핼리혜성은 75년에 한 번 지구에서 볼 수 있다는데, 그런 혜성이 지금 용인에 떨어진 셈 치자. 그러니, 김환기라는 별 하나, 점 하나를 만나기 위해 바로 길을 나서야 한다. 전시는 9월 10일까지. 유료. 예약 필수.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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