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은혜의 우산
새벽부터 장대비가 내린다.
서두르다가 우산도 못 챙긴 채 봉투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다. 우의를 입고 촘촘히 걷는 이들이 부러워 교회 현관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문득 자카르타에 살던 때가 생각났다. 열대야의 인도네시아 너무나도 따가운 햇볕, 진종일 더위가 이어지다가 눈 부신 햇살 뒤에서 잠시 회색 구름이 일어나면서 천둥 벼락과 함께 비가 쏟아지곤 했다. 그런 날이면 우리 가족은 모두 달려 나와 두 팔 벌려 비를 반겼다. 빗줄기가 고국의 소식을 싣고 오는 것처럼, 태평양을 건너다 행여 고향의 안부가 끊길까 봐! 상상의 날개를 펴던 날들, 삶의 훈련장이었던 그곳의 생활은 외롭고 지루했지만 감사한 날들도 많았다.
지금 그곳이 왜 이토록 그리울까. 으르렁 쾅쾅 천둥·번개 소리도 한순간에 시치미를 딱 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금방 청명하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자카르타 번둥안(10가 64번지)이 생각난다. 가슴이 푹 젖어 드는 그리움, 노적처럼 쌓인 추억 갈피를 열고 나니 시멘트 바닥 위를 스쳐 가는 물소리가 도란도란 사랑의 가락으로 다시 들려온다. 지구의 기후변화로 세계를 경악시키는 쓰나미가 여러 모습으로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온갖 재난으로 인명을 앗아가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평온은 언제까지 우리 곁에 머물지, 불확실한 미래를 살고 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저수지에 물이 고일 수 없으니 그저 자연이 공급해주는 혜택을 값없이 누리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자주 망각한다.
고요한 이슬비와 봄에는 촉촉한 봄비, 여름에는 소낙비로 열매를 씻고 단단히 여물도록 마지막 불볕으로 마무리를 도우시는 신의 섭리. 창조주의 뜻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가을추수의 벅찬 감사를 무엇으로 다 표현하랴.
오색낙엽을 만들어내는 비가 어느 날 단절되고 성경에 쓰인 대로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가 기도했던 대로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그 백성들의 긴 고통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끔찍하다. 그 이후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 응답으로 다시 비가 내렸다는 성경 말씀이다. 그들이 얼마나 감격했을까, 모든 비가 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비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1950년대를 살아온 기성세대들은 가뭄을 겪던 그때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척박한 땅 위에 비가 내리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그 간절한 마음들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다. 종종 하늘을 향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누가 그들에게 무모한 짓이라고 비난하겠는가, 추수의 결과물인 모든 열매가 그들의 목숨이고 인생이며 보람인 것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자주 따라 다녔다. 바구니를 들고 콩밭으로 나선다. 거기에 열린 콩이 채 여물기도 전에 가뭄에 못 이겨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진 콩밭을 보았다. 그 땅바닥을 만지며 아이코 어쩌면 좋으냐며 목메던 할머니 얼굴이 아직 눈에 선하다. 물 없이 살 수 없는데 물은 곧 생명임을 망각하고 습관적으로 비가 지겹다느니, 이놈에 비가 그칠 줄 모른다느니 라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심지어는 하늘에 구멍이 났느냐, 날씨가 미쳤다고 거침없이 망발하기도 한다. 지각이 없는 어리석은 말들이다. 도처에서 물 부족 현상이 늘어나는데 물값보다 기름값이 훨씬 싸다고 하자, 물 쓰듯 기름을 쓰고 쌀 수 있을까? 어이없는 일이다.
물 한 방울에 목숨 걸 날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우리가 물 마실 때마다 감동한다면 물에서 엔돌핀의 4000배가 넘는 대돌핀이라는 유전자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모두 감사하는 우리 입의 습관에서 이뤄진다니 우리 모두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메마른 가슴들이 푹 젖을 때까지 비가 오려는가 보다 아직도 비가 내린다. 비만 오면 어린애처럼 좋아하던 남편과 42년을 살았으면서도 나 역시도 비가 오면 영업이 부진할 것에 염려부터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가난과 한숨을 멀리멀리 날려 보내주는 고마운 비, 은혜의 비, 메마른 눈에는 참회의 눈물이 되기도 하고 외로운 자에게는 친구가 되는 비, 아직 비가 그치질 않아서 경비실을 기웃거린다.
“여기 우산 하나 있어요. 딱 하나 남았어요. 비닐 백도 여기 있습니다.”
봉투 마냥 부실한 내게 비 오는 날 우산이 되어준 손길, 생각해보면 은혜의 빗줄기는 늘 그치지 않았다. 삶의 가파른 길목마다 내 손 잡아주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주님께 그들의 안녕을 부탁드린다. 우리 살아 있는 동안 어느 길목에서 다시 만날지. 나는 비 오는 날 누구의 어깨 위에 우산이 되어 주었던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 1, 2)
<어찌 보통 일이겠는가>
이른 아침 귀가 열려
우짖는 새소리 들리고
눈이 열려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는 것,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내 삶에는 비바람
된서리 뿐이었다,
하지 말자
비바람 된서리 없이
올곧게 서있는 나무가 있겠느냐
나는 열매가 없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
하지 말자
내 몸속에 은줄과 금줄이
아직 탱탱하고
두 눈 여전히 밝아
새벽까치를 반기는 것
어찌 보통 일이겠는가
해일이 쓸어가고
도처에 역병이 창궐한데
아직 팔다리 붙어있어
생쌀을 씹을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행복, 행복하다고 말하자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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