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세실 레스토랑이 노키즈존이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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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현 기자]
▲ 28년생 김정임을 보내며. |
ⓒ 최지현 |
할머니는 외할머니에게 흔히 기대하는 포근함이나 인자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꼿꼿하고 엄격했으며 완벽주의자였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평소에 잊고 있던 할머니에 대한 수많은 기억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며 할머니의 사랑이 어떤 모양이고 어떤 빛이었는지를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할머니가 나에게 남기고 간 것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할머니의 유산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간직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머니를 애도하는 방식이다.
할머니의 초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할머니가 데려갔던 전시가 기억난다. 첫 번째는 종이로 만든 인형전이었다. 종이인형들의 몸과 얼굴은 풍선처럼 둥그랬고 한복을 입고 있었다. 모두 천진하거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얇으면서도 강한 닥종이의 거친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두 번째 전시장에는 텔레비전들이 가득했다. 텔레비전 위에 텔레비전이 놓여있었고 화면에서는 지지직거리며 흑백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질적인 풍경과 감각이었다. 그것은 닥종이 아티스트 김영희와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전시였다. 30년도 전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작가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할머니가 나를 마지막으로 데려갔던 곳은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윤이상 작곡가의 현대음악 공연이었다. 나의 키가 어느새 할머니를 훌쩍 넘어 있을 때였다. 모국이 동경하는 서구 세계에서 더 먼저 인정받은 세계적인 음악가, 라는 타이틀도 클래식에 익숙한 나의 음감을 단번에 바꾸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들은 불협화음처럼 느껴졌고 끝날 때까지 귀에 설었지만 할머니의 제안으로 윤이상 작곡가가 남긴 음악을 같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들뜨는 일이었다.
▲ 지금은 문을 닫은 2009년 당시 세실 레스토랑 사진. |
ⓒ 연합뉴스 |
할머니는 가끔 지하에 있는 세실레스토랑에 나를 데려가 뜨거운 블랙커피 한 잔과 파르페를 시켰다. 물론 파르페는 나의 몫이었다. 레스토랑의 불빛은 언제나 조도가 낮았다. 노키즈존 따위의 말이 없어도 그곳은 명백히 어른들의 세계였다. 초대장 없이는 어린이가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것 같은 금단의 공간이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와 비밀들이 속닥거리던 공간. 작당모의하기 딱 좋은 곳이었지, 싶더라니 1979년에 문을 연 이후 재야인사들이나 시민단체의 기자회견 장소로 자주 쓰이면서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었던 공간이라고 한다.
아무튼 어른들의 세계에 초대받아 어깨가 으쓱, 코가 머쓱해진 어린이는 기다랗고 입구가 점점 넓어지는 유리잔에 담긴 파르페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천천히 음미했다. 파르페라는 것은 어린이가 평상시에는 접할 수 없는 어른스럽고 사치스러운 음식처럼 느껴졌는데,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그 대단한 모양새가 그러했다.
어린이는 기다랗고 투명한 유리잔에 각기 다른 재료들이 차곡차곡 층을 이루고 있는 모습에 먼저 압도당한다. 한 스쿱씩 담겨진 바닐라, 딸기, 초콜렛맛 아이스크림을 떠먹다 보면 후르츠칵테일이 나온다. 파인애플, 체리, 복숭아. 그 아래층은 시리얼층이다.
인내심을 갖고 조금 눅눅해진 시리얼을 먹다 보면 본래의 바삭한 식감을 유지하는 시리얼들이 나타난다. 내가 파르페 잔을 비우는 동안 할머니는 각설탕 한 덩어리를 커피에 넣고 천천히 마셨다.
이제는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먹던 시절도 졸업했고 설탕에 절인 상태로 오랜 시간 보존된 과일은 눈길도 주지 않지만 더 이상 세실레스토랑에서 파르페를 맛볼 수 없다는 건 무척 슬픈 일이다. 그 시절의 세실레스토랑이 부활한다 해도 어른들의 공간에 잠입한 어린이의 설레는 마음은 다시 돌아올 수 없겠지, 싶은 생각이 들어 더더욱 슬퍼진다.
어린이에게 좋은 대접을
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해주었던 것들이 좋은 대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문화적으로 새로운 경험에 노출시켜 주는 것, 감각의 성장판을 열어주는 것이 어린이에 대한 좋은 대접이라는 것도. 또 어린이를 나의, 어른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이런 것에는 흥미가 없을 거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수준에 맞지 않을 거야, 미리 판단하지 않기. 당장의 반응이 없더라도 심어진 경험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발아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 시절 세실 레스토랑이 노키즈존이었다면, 전시장이 노키즈존이었다면 그 당시 어린이는 어른들의 세계를 잠시 잠입하여 어른의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은 몰랐을 테고, 백남준이 누군지 몰라도 뭐 큰 문제는 없었겠지만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도 몰랐을 것이다. 못했어도 그만인 일들일 수도 있지만 그 경험들이 없었다면 어린이에게 좋은 대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할머니가 나에게 주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나도 어린이에게 좋은 대접을 해주어야지, 다짐한다. 좋은 대접은 좋은 대접을 낳고 만다. 세상에 존재하는 환대는 이렇게 대를 내려온 좋은 대접의 체험 덕분이라 믿는다. 사물을 대하는 열린 태도, 낯섦을 견디는 인내심,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내게 있다면, 그것은 할머니가 심어준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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