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실패가 낳은 희망 '신성한 이혼'

조건준 2023. 5. 1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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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신성한 이혼> 과 출산파업

[조건준]

'신성한 결혼'이라는 표현을 쓰던 것은 벌써 오래된 과거만 같다. 티브이를 보다가 무심코 보게 된 드라마에 시선이 꽂힌 것은 조승우라는 배우의 연기가 좋은 탓도 있지만, 이혼 스토리가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신성한, 이혼>이 다룬 첫 이혼 소송은 젊은 남성과 혼외정사 동영상이 퍼진 유명 라디오 여성 DJ의 이혼 소송이다. 섹스 동영상이 퍼진 여성, 그것도 불륜으로 낙인찍혀 세상의 온갖 지탄을 받는 여성이 아들의 친권을 지키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처럼 보였다.

'흠이 있는 여성'을 변호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드라마는 주인공(조승우)을 통해 혼외 섹스 동영상이 퍼진 여성, 시어머니를 때린 여성의 이혼 소송, 조현병으로 아픈 여성의 이혼 소송을 변호한다. 이렇게 약점이 있는 여성들에게도 이혼할 권리가 있다. 물론 이 여성들의 혼외 섹스나 시어머니를 때린 배경에는 그보다 더한 억압과 폭력이 있다. 드러난 '흠' 속에 묻힌 더 혹독한 맥락을 드러낸다는 것만이 아니라, 설혹 어떤 결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누군가 누려야 할 권리마저 짓밟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가 보여서 좋았다.

결혼만이 디테일하게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혼도 디테일하게 다뤄져야 한다. 만남이 소중한 것만큼 이별도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이혼을 깊게 다룰 수 있을 때 결혼도 온전하게 다룰 수 있으며, 이별을 잘할 수 있을 때 만남도 더욱 깊어진다. 드라마에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에게 유모차를 선물하며 이혼하는 남자가 나온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아픈 것은 아픈 대로 기억하면서 이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것은 나쁜 대로 서로 공감하면서 헤어지는 '자각 있는 이별'이야말로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연애력은 국력이다"라는 오래전 드라마 대사가 늘 뇌리에 박혀있다.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데 필요한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물질적 정신적 조건, 관계에서 오가는 밀당(다르게 말하면 교섭), 갈등을 극복하는 능력을 비롯한 제반 요소들이 연애에 녹아있다. 그래서 개인적 관계와 집단적 관계는 물론 사회 갈등을 풀어가는 국가 역량도 연애력과 무관하지 않다. 비록 작용하는 요소들이 좀 다를지라도 국가와 국가의 관계를 풀어가는 외교력도 연애와 마찬가지로 관계를 풀어가는 역량인 '관계력'에 달려있다.

대한민국이 역대급으로 실패한 산업이 있다. 짝을 맺어주는 기업과 웨딩에 관련된 결혼산업, 산후조리원과 산부인과를 비롯한 출산에 관련된 산업, 육아에 필요한 어린이집과 유치원과 직장맘을 위한 모성보호와 교육을 비롯한 국가정책에 이르는 결혼, 출산, 육아와 관련된 산업이 그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을 산업적 필요에 따라 바라보는 세상이다. '압축성장'을 자랑해온 대한민국은 '출산절벽' 앞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대한민국의 실패는 성장주의에 맞선 가장 강력한 저항으로서 출산파업의 강력한 성공을 의미한다. 지금도 멈추지 않고 성장주의에 온 힘을 기울이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사회를 흔들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출산파업이다. 성장주의에 따르면 인구는 계속 늘어야 하고, 출산율은 계속 높아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압축성장' 스토리에 푹 빠진 사람들에게 '출산절벽'은 견딜 수 없는 재앙일 것이다.

왜 출산율 저하가 그토록 문제란 말인가. 급속히 늘어난 인구, 쉼 없이 배출해대는 탄소, 무너지는 생태계, 압살당하는 생물 다양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환영할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출산율 저하로 인한 노령인구의 증가에서부터 미래 세대에게 점점 감당하기 어려운 연금 제도, 노동권이 박탈된 이주 노동자 증가와 인종주의적 우익정치 등 새로운 갈등이 크고 있다. 성장주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축소되는 세계를 대비하는 지혜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단없는 '출산파업'은 우리의 발상을 바꿀 것을 촉구한다.

하나의 드라마에서 이런 얘기까지 끌어대는 것은 과도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드라마는 클래식을 전공한 피아니스트였던 변호사가 트로트를 크게 틀어놓고 스트레스를 날리는 모습, 심각한 소송에 둘러싸여 있지만 중년 남성들의 시시껄렁해 보이는 일상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우정, 라면을 먹으며 와인을 반주로 마시고, 와인 잔에 소주를 마시는 등 이상한 조합과 능청스러운 연기와 유머들이 있어 그렇게 무겁지만은 않다. 원래 세상은 이런 다양한 것들이 앙상블을 이룬 '잡파월드'다.

무엇보다 '신성한 결혼'이 아닌 '신성한 이혼'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발상이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후위기에 대한 수많은 경고와 기후 정의를 위한 숱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탈성장'을 가장 강력하고 줄기차게 실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기후위기 시대에 그 모든 실천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에게 '전환역량'을 갖출 것을 시사하는 것은 '출산파업'이다. '생산력' 중심의 산업을 넘어 '관계력' 중심의 사회를 상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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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조건준 아유 대표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5,6월호 '드라마 만나기' 꼭지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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