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엔 약, 성장엔 독…글로벌 상장사 자사주 매입 3배 늘었다

권해영 2023. 5. 1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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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00개사가 1.3조 달러 매입"
단기 주가 상승…투자여력 줄어 장기 악재
美 정치권·재계서도 논란
바이든 "자사주 매입 세율 1→4% 올려야"

글로벌 주요 상장기업의 지난해 자사주 매입 규모가 10년 전보다 3배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자사주 매입은 기업의 미래 투자 자금을 주가 부양에 쓴다는 점에서 기업의 장기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자사주 매입 10년간 3배 증가

16일(현지시간) 미국의 자산운용사인 야누스 헨더슨은 글로벌 상장기업 1200개사가 지난해 자사주를 총 1조3000억 달러(약 1742조 원) 가량 매입했다고 밝혔다. 이는 10년 전보다 3배 증가한 수준으로 같은 기간 주주 배당금 지급 증가율(54%)을 크게 상회한다.

미국 자본시장의 흐름으로 자리잡은 자사주 매입 확대 추세는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상장사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2012년 3330억 달러(약 446조 원)에서 지난해 9320억 달러(약 1249조 원)로 3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영국은 220억 달러(약 29조 원)에서 700억 달러(약 94조 원)로 3배 이상 불어났고, 유럽(영국 제외)도 1480억 달러(약 198조 원)로 2배 이상 늘었다.

업종별로는 고유가로 천문학적인 실적을 거둔 석유 업종의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을 대폭 늘렸다. 이들 기업이 지난해 사들인 자사주는 1350억 달러(약 181조 원) 규모로, 1년 전의 4배에 달한다.

글로벌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올 들어서도 애플, 메타, 에어비앤비, HSBC, 컴퍼스 등 주요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 계획을 잇따라 내놨다. 메타가 400억 달러(약 54조 원), 골드만삭스가 300억 달러(약 40조 원)의 자사주 매입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지난 4일 애플도 올 1~3월 실적 발표 후 자사주를 900억 달러(약 121조 원) 사들이겠다고 밝혔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단기 주가 상승…"장기 성장엔 독"

사실 기업의 자사주 매입은 주주들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기업이 보유 현금을 활용해 자사주를 사들이면 시장에서 유통되는 주식수가 줄어 주가가 오를 가능성이 커, 대표적인 주주친화정책으로 꼽힌다. 기업들이 경영진 평가에 사용하는 주당순이익(EPS)도 올라간다. 많은 국가에서 배당엔 많은 세금을 매기지만 주가 차익에 대해선 세금이 적거나 없어 주주 입장에선 세금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경영진과 주주 모두에게 자사주 매입이 이익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관점에서 기업과 주주의 윈윈(win-win)으로 볼 수 있다. 기업이 보유 현금을 투자 재원 대신 자사주 매입에 충당할 경우 그만큼 성장과 일자리 창출 여력이 줄어든다. 단기 이익을 노리는 주주와 경영진에겐 자사주 매입이 유리할 수 있겠지만, 기업의 미래 성장과 장기 투자자 관점에선 자사주 매입이 오히려 기업 가치를 갉아먹는 독이 될 수 있다.

페더레이티드 에르메스의 대니얼 페리스 펀드 매니저는 자사주 매입에 대해 "환경적인 위험"이라며 "트레이더, 헤지펀드, 고위 경영진과 단기 주가에 도움이 된다"고 지적했다. 뉴튼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의 유언 먼로 최고경영자(CEO)는 "우리는 자사주 매입이 덜 일반적이길 원한다"며 "자사주 매입을 잘못 활용하면 (경영진이) 중기 경영 인센티브 목표를 달성하려고 주당순이익(EPS)을 조작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이는 기업의 장기 건전성에 중요한 투자를 희생시킨다"고 꼬집었다.

자사주 매입이 반드시 주가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란 분석도 나온다. 기업 주가를 추적하는 인베스코 펀드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실시한 기업들의 주가는 미국 시장 수익률을 하회한 것으로 나타났다. 피델리티의 레이 힘스워스 영국 주식 펀드 매니저는 "(자사주 매입 후)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면 기업이 현금을 다 써버리고 난 뒤라 상황이 더 악화된 것"이라며 "주주로서 실제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느낄 수 있다"고 짚었다.

바이든 "자사주 매입 세금 확대"…美 정치권·재계 갈등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확대는 미국 정치권과 재계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정치권에선 자사주 매입으로 일부 경영진과 대주주 등 부유층에만 이익이 집중된다고 비판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월 국정연설에서 자사주 매입에 대한 소비세율을 현행 1%에서 4%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지난해 8월 내놓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올해부터 자사주 매입액에 1%의 소비세를 부과하기 시작한 데 이어, 세율을 다시 4배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주주들에게 보낸 연례 서한을 통해 '경제 문맹자', '정치 선동가'란 표현을 써가며 바이든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은 최근 기업들을 상대로 자사주 매입 관련 정보 공개 확대 방안을 추진중인데, 미 상공회의소는 자사주 매입이 자본시장 건전화·효율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사주 매입 확대 추세가 반전되긴 어렵지만 경기 침체로 기업 수익성이 둔화되면 자연스럽게 진정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S&P 500 기업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올해 8080억 달러(약 1083조 원)로 1년 전보다 5%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배당금 지급은 같은 기간 5% 늘어난 6280억 달러(약 842조 원)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의 데이빗 코스틴 미국 증권 수석 전략가는 "미국 기업의 이익 둔화, 최근 은행 스트레스에 대한 정책적 불화실성 증가, 높은 밸류에이션(평가가치) 등으로 자사주 매입 움직임이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권해영 기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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