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Q sign #13] 헛고생은 아니리라
그냥 학교만 갔다 오는 게 공부가 아니다. 학교에 가면 당연히 이런저런 숙제들과 각 과목의 프로젝트를 기한 안에 제출해야 한다. 학비만큼, 아니 그 이상의 장비와 실습비가 필요하다. 할인판매를 하는 옷은 싸지만 새 옷감은 저렴하지가 않다. “Joan”에서 학생증이 있는 사람에게 15%를 깎아 준다고 해도 넉넉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그 비용들이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헌 옷을 파는 데 가서 헝겊 분량이 많은 드레스를 사다가 뜯고 빨고 다려서 사용하기도 했다.
악착같이 43과목을 마치고 한 과목을 제외한 42과목에 A 학점을 받았다. 고생은 무지했지만, 생판 낯선 도시에 와서 “결국은 해냈다!”라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마침내 2014년 6월, 일곱 가지의 Professional Certifications(전문 자격증)를 취득했다. Denver Convention Center에서 이루어진 졸업식에는 General Educational Development Class(미국 고등 검정고시) 졸업생들까지 있어서인지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미국 시민권 선서는 1989년 3월, Los Angeles Convention Center에서 했다. 모든 도시마다 있는 컨벤션 센터를 보면서, 불현듯 한 광경이 떠 올랐다. 그것은,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이 미국에서 각 인종이 각기 다른 자신들의 언어로 함께 성경을 통독하는 모습, 그리고 찬양과 기도의 모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들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모습들이다.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멋있는 일일까.
하나님, 애당초 예배를 제대로 올려 드리기 위해 세워진 이 미국이 다시 하나님께로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종도 피부색도 언어도 각기 다르지만, 한 하나님 안에서 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함께 모여 말씀을 통독하고 찬양하며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주님과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자, 이제 준비는 끝났다. 터득하게 해 주신 재능과 기술로 돈을 벌어서 자비량 사역을 하자! 사례비를 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면 직접 벌어서 하면 되는 거지, 사도 바울처럼. Fashion계의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해 나를 이편에 세우시는 주님, 분명히 많은 간증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성취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오르던 그 시간, 한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평상시에는 통 전화도 하지 않고 지내는, 일 년에 두 어 번씩 편지나 주고받는 분인데 전화기를 들자마자 내 귓속으로 쏟아지는 말은, “왜 그렇게 전화를 받지 않아, 여러 번 했는데?” “제가 아주 바빠서요. 그런데 목사님 무슨 일이세요?”
그분의 말씀인즉, “어느 작은 도시의 International 교회에서 여자 Co-pastor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갈 생각이 없느냐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깔깔대고 웃었다. “아니, 어느 교회에서 이렇게나 늙은 할머니 목사가 필요 하대요?” “할머니 목사가 필요 하대, 그 교회가?”
뜻밖의 전개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민 초기에도 이제 슬슬 궤도에 들어섰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에 신학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내가 Fashion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도 싫어하신다는 건가. 그럼, 왜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를 하게 하신거지? 진실로 많은 생각들로 헷갈리고 고민스러웠다. 그동안 수고하며 고생한 시간이, 애써서 취득한 전문 자격들과 기능들이 모두 무효가 된다고?
내 작은 머리로는 이해 불가의 상황에 맞닥뜨렸지만, 원래 먼지 같은 인간인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짐작인들 할 수가 있으랴. 사실, 내게 뜻밖의 전화를 준 사람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웃고 넘겨 버릴 수도 있었을 터. 그러나, 나성순복음교회 국제 금식기도원 원장이신 고 헬렌 목사님이셨고, 나는 이분이 누구인지 잘 알며 이 분도 나를 잘 아신다.
1982년 12월, 이민자의 신분으로 LA에 도착해서 곧바로 찾아 들어간 교회에서 당시에 9살과 11살이던 내 아이들의 교육부 전도사님이셨다. 인생의 고비마다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드릴 때 큰 힘이 되어 주셨던 분. 목사님 숙소에 머무를 때 보면, 본인 침대에서 편안히 누워 계신 것을 보지 못했다. 기도원 성전에서 밤새 기도를 드리곤 하셨으니까. 식사량도 적으신 분이 금식은 왜 그렇게도 자주 하시는지….
결론적으로, 내가 이해가 되고 안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용하시는 주의 여종을 통해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당연히 순종해야 하는 게 맞다. 나의 가는 길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나님께서 오른쪽으로 가라 하시든 왼편으로 가라고 하시든 되돌아 가라고 하신들, 왜 그 말씀을 따르지 않겠는가.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 9)
그렇다! 내 생각과 내 계획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뒤돌아보라, 내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졌는지. 이미 경험한바, 순종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을 익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 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이날 이때까지 들어보지도 못했던, 무지막지하게 더워서 평소에 살고 싶지 않았던, Arizona, 거기의 소도시로 가야 한다고? 하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함께 하신다면, 어디인들 가지 못하랴. 그해 8월 중에, 그 교회로 인터뷰 부흥회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간 끝에, 그해 10월 30일에 그 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과 남편들은 모두 미국 분들이고 사모님과 아내들은 모두 한국 분들인 아담한 교회였다. 만 67세에 Co-Pastor(협동 목사)로 보내 주셨으니, 내 마지막 사역지가 되겠구나! 이분들과 함께 사랑하며 기도하며 인생의 남은 시간을 살게 되겠구나! 그리고, 사실상 내가 그렇게 난리를 치며 Fashion Design을 공부한 이유도 사역하기 위함이었지 돈을 벌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렇게 마음이 정리되니, 새로이 만나게 해 주신 그 교회 성도들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교회 식구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다.
진실로 오랜만에 중보기도 모임을 시작했고, 금요일 구역예배 시간엔 성경통독을 시작했다. 새벽예배도 요일별로 담임 목사님과 나누어 인도하게 되었다. 느끼기에, 성도들은 순수했고, 어쩌면 그들에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할머니 사역자가 실지로 필요했겠다 싶었다. 사역 현장에서의 소소한 기쁨과 행복으로, 나는 또다시 서서히 발동을 걸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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