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전 만난 파독 간호원을 떠올린 독일마을

오문수 2023. 5. 1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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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화전별곡길을 걷다

[오문수 기자]

 남해 독일마을 파독전시관 입구 모습
ⓒ 오문수
제주에 올레길이 있다면 여수엔 비렁길이 있고 남해엔 바래길이 있다. 여유 있는 시간이 있어 경치 아름다운 남해 바래길을 걷기 위해 남해로 떠났다. 노량대교를 건너 남해 시가지를 벗어나 창선대교를 건너기 직전에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다 됐다.
창선교 바로 앞에 있는 지족 농협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강진만쪽 바닷길을 걷기 위해 지도를 살펴보니 특별한 게 없다. 식당 주인 아주머니한테 "창선면에서 강진만에 면한 바닷길을 걸을 계획"이라고 하자 "경치는 좋지만 특별히 주목할 게 없을 것이라며 차라리 '화전별곡길'을 걷는 게 나을 것"이란다.
  
 '화전별곡길' 중간에서 만난 봉화마을 노거수 모습
ⓒ 오문수
   
 화전별곡길을 걷는 동안 만난 계곡 모습으로 섬속 풍경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 오문수
 
점심을 먹은 후 곧바로 독일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파독전시관을 둘러보다가 시간을 31년 전으로 되돌렸다.

잊을 수 없는 파독간호원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꾸고 있던 사람들에게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진 것은 1989년이다. 1989년 이전에는 모든 국민이 허가를 받아야만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다.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했으며, 자유총연맹의 반공교육 등을 이수 후 허가를 받고서야 여권을 만들 수 있었다.

영어 교사로 유럽 여행을 꿈꾸던 필자에게 기회가 온 것은 1992년 여름방학이다. 친구도 없이 혼자서 도전한 해외여행은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되는 순간순간이었지만 런던이나 베를린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한국 대학생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6개월 동안 여행안내서를 읽고 방문하고자 할 목적지에 대해 공부했지만 돌발 상황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덴마크를 거쳐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돌아보고 독일 베를린행 열차를 탔지만 사전에 좌석을 예약하지 못해 열차 통로에 비닐을 깔고 자고 있었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었으니 유레일패스 1등석 표가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새벽에 발트해를 건너 베를린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가던 중 국경 경찰이 여권을 보여달라고 해 목에 걸어두었던 여권을 보여준 후 통로에서 잠이 들었다. 베를린에 도착해 구경을 마치고 체코 프라하행 열차를 타기 위해 체코 영사관에 도착해 목에 걸어둔 여권을 꺼내 보니 여권과 신용카드가 사라져버렸다. 필시 누군가가 내목에 걸어두었던 여권을 훔쳐간 게 틀림없었다.

아! 이런 낭패가. 할 수 없이 베를린 경찰서를 찾아가 여권을 분실했다는 증명서를 받아 한국 영사관을 찾아가니 보안 담당자가 꾸지람을 하며 임시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줬다.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다시 체코 영사관을 방문해 통행증을 발급받으려 했지만 정식여권이 아니라며 '불가능(impossible)'하다며 돌아가란다. "누군가가 여권을 훔쳐가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은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도통 들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어 "I'm from Korea(나는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사정하는 순간 내 뒤쪽 줄에서 "한국 분이세요?"라는 한국말이 들려왔다.

한국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온 한국말은 구세주 같은 목소리였다. 반가워서 돌아보니 틀림없는 한국 사람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가 통행증 발급창구 직원에게 독일어로 설명하자 내 여행증명서에 도장이 찍혔다. 알고 보니 그녀는 파독간호원으로 아들과 함께 프라하 여행을 위한 입국허가서를 받으러 왔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아직 열차 출발 시간이 5시간이나 남았으니 우리 집에 가서 식사나 하자"고 했다. 그녀를 따라 걸어가는 중간에는 지하실이 있었고 "이곳이 히틀러가 권총 자살한 현장"이라고 설명했다.
 
 남해 독일마을 전경
ⓒ 오문수
   
 독일마을 파독광부 전시관에 있는 사진으로 지하 1200m탄광으로 들어가는 파독 광부들의 아침 인사는 '살아서 돌아오라'는 '글릭아우프' 인사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리운 고향과 가족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 오문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좋아하지 않는 빵과 사과로 끼니를 때우던 나에게 그녀가 해준 김치 갈비찜은 최고의 음식이었고 무려 세 그릇을 먹었다. 독일에서 만난 광부와 결혼한 그녀의 따뜻한 호의는 "아! 한민족이라는 게 이런거구나!"라며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귀국해 인삼과 최고급 김을 선물로 보내며 몇 번 편지가 오갔는데 지금은 소식이 끊겼다. 혹시나 그분이 독일마을에 살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남의 신상정보를 알려줄 수 없단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화전별곡길'의 아름다움에 취해

화전별곡길에는 '남해양떼목장'과 '양마르뜨언덕'을 둘러보는 코스가 있다. 몽골을 여행하는 동안 수백만 마리의 양떼를 만나본 내게 '양떼목장' 방문은 의미가 없다.
  
 독일마을에서 '내산'길을 따라 혼자 걷는 길은 "섬속에 이렇게 멋진 모습이 숨어있었나?" 하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초록이 주는 싱그러움과 폐부까지 찌르는 맑은 공기가 주는 멋진 모습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 오문수
   
 이렇게 맑은물과 신선한 공기가 흐르는 이곳을 섬 경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오문수
'내산'길을 걸어가는 길 주변은 새싹과 새로 돋아난 잎들의 향연이 열렸다.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거의 없다. 그야말로 나혼자 거리를 전세낸 것 같은 느낌이다. 바다가 보이지 않고 온통 산과 논밭 초지들로 가득한 길을 혼자 보기 아깝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산하를 두고 사람들은 서울로, 서울로만 고집하는 지 안타깝다. 모든 게 서울로만 집중되는 서울공화국 정책이 문제다.
한참을 걸으니 오래전에 방문했던 '바람흔적미술관'이 나타났다. 농업용 저수지를 배경으로 멋진 모습을 한 미술관. 다리도 쉬어줄 겸 차나 한 잔 할까 해서 들렀더니 쉬는 날이다. 거의 대부분 관광지에 있는 기념관이나 미술관은 월요일이 휴무일인데 이곳은 화요일인데도 휴무란다.
  
 바람흔적미술관 모습
ⓒ 오문수
국립편백자연휴양림에 들르니 이곳도 휴무라며 돌아가란다. 할 수 없어 한참을 되돌아가 임도를 따라 고개를 넘으려는데 조그만 유조차가 지나길래 차를 세우고 가는 길을 물으니 운전수가 "아니! 이 산을 걸어서 '천하마을'까지 걸어간다고요?"라며 기가 막히다며 "허허!" 웃는다.

"저 산을 넘어 가면 깜깜한 밤에 '천하마을"에 도착합니다. 빨리 조수석에 타세요. 정상부까지 데려다 줄테니까."

조수석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편백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정상부에서 차를 내려 '천하마을'까지의 이정표를 보니 4킬로미터가 넘는다. 고마운 운전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깜깜한 밤에 고개를 넘었을 거라는 생각에 아저씨에게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다.
 
 국립편백자연휴양림을 지나 '천하마을'로 가는 임도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 오문수
   
 해변가에 세워진 멋진 벌 모습으로 관광객들의 사진 배경이 되었다
ⓒ 오문수
상주면과 미조면의 경계인 '천하마을'은 금산에서 뻗어내린 쇳개골(金浦)과 내래골(川下)이라 칭한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흘러나온 풍부한 물로 두 개의 수원지를 만들어 일제강점기부터 미조면민의 식수원이었다.

천하마을에 도착하니 미조면에 살고있는 사진작가 이해선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해선씨의 차를 타고 독일마을까지 되돌아오는 순간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하나. 여행이 주는 즐거움은 경치도 좋지만 우연히 따뜻한 사람들과 만나 교감할 때 즐거움이 배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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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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