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스마트폰을 자꾸 남편에게 맡기는 이유
[백세준 기자]
나는 외출할 때 손에 뭘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 주머니에 쑤셔 박고 두 손은 자유롭게 있는 상태가 좋다. 내가 찬양하는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박해일)는 마치 도라에몽처럼 챕스틱과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서래(탕웨이)는 해수의 주머니 이곳저곳 뒤지며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내게는 뭔가를 들고 다닌다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와이프는 외출을 할 때면 자꾸만 자신의 스마트폰을 나에게 맡겼다. 잠시만 들고 있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계속. 이미 내 주머니는 물건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넣을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나는 와이프의 스마트폰을 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이럴 줄 알았으면 내 짐 하나를 덜 들고 나왔지). 곱씹어보니 꽤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와이프는 나와 마찬가지로 외출할 때 짐을 최소화한다. 그 흔한 핸드백 메는 것도 싫어하고 지갑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카드는 낱장으로, 거기에 스마트폰이면 충분하다. 연애 초기에는 지갑과 핸드백을 사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자 시위라고 생각을 해서 선물로 준 적도 있었는데, 내 성의를 봐서 그런지 며칠 들고 다니더니 이내 기존 방식대로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브랜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하고 조금 더 고가의 지갑과 핸드백을 알아보았으나 '아니야, 이 여자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그래서 안 들고 다니는 거야'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구매를 포기했다(절대 비싸서 그런 건 아니다. 돈 굳었다고 절대 좋아하지 않았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책 표지 |
ⓒ 웅진지식하우스 |
영국의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다양한 영역에서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분야에서 '남자'가 디폴트값으로 설정돼 있어 인류의 절반인 여자가 설 자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부제는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인데 어떤 정책이나 제도뿐만 아니라 물건을 하나 만들 때도 '젠더 데이터 공백' 때문에 평등한 결과값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젠더 데이터 공백은 쉽게 말해 데이터를 성별로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수집한다거나 더 나아가 남성에게만 편향된 데이터만을 수집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남성이 이 세계의 기본값이 되는 것이다. 진단 자체가 잘못됐으니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수 없는 이유다.
이 책은 일상, 직장, 설계, 의료, 공공생활, 재난이라는 큰 카테고리로 총 6부로 구성돼 있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과 동떨어진 거대 담론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여성들이 실생활에서 정말 작지만 불편한 점을 세세하게 이야기해 준다는 점이다. 성별이 달라 나 같은 남성들은 당사자가 말해주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남성들이 많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여성들이 실생활에서 매일 겪는 불편함
가령 화장실에 줄 서고 있는 여성들을 본 적이 있는가? 유명한 관광지나 지하철역 등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의 화장실에는 어김없이 여성들만 줄을 서있다. 나도 와이프와 주말에 나들이를 갈 때면 와이프는 대부분 줄을 서서 기다리고 나는 기다림 없이 들어갈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어서 그런 걸까?
겉보기에는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에 똑같은 면적을 부여하는 것이 공정해 보이고 지금껏 그렇게 설계되어 왔다. 위생공사 기준에도 면적을 50대 50으로 분할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남자 화장실에 소변기와 칸막이(변기)가 같이 있다면 동시에 용변 볼 수 있는 인원수는 여자 화장실보다 남자 화장실이 훨씬 많다. 아까까지 동등했던 면적이 갑자기 동등하지 않은 면적이 된다.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화장실뿐만이 아니다. 대기업이라고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이다. 세계적인 대기업 구글에 임산부 전용 주차장이 없다가 여성 임원이 임신을 해서 그제서야 주차장에 임산부 전용 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것도 임원이기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구글이라는 회사에 그때까지 임신했던 여성이 단 한 명도 없었을까?
이러한 성별 불평등은 도처에 널려 있다. 서두에 말했던 내 와이프가 스마트폰을 자꾸 내게 맡기는 이유에 대한 해답도 이 책에 들어 있다. 바로 스마트폰의 크기와 여성 의류에 대한 문제다. 먼저 스마트폰의 크기는 평균 6인치(152.4mm)다. 초기 아이폰 모델은 액정 크기가 작았지만, 최근 들어 액정 크기는 점점 커지고 있다. 애플은 한 손으로 조작해도 문제없다고 하지만 평균적으로 남자들보다 손이 작은 여성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벽돌 같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까?
나는 몇 년 전에는 아이폰6플러스를 사용했는데 그 크기가 약 158mm였다. 액정이 상당히 커서 손이 큰 나도 부담스러웠다. 한 손으로 타이핑을 하다가 떨어뜨릴 뻔한 적도 꽤 많았다. 액정이 크면 영화나 드라마, 신문 기사 등 보고 읽는 것에 편리하지만 보관이 어렵다. 주머니에 넣어도 두툼해지고 주머니 밖으로 삐죽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쭈그려 앉을 때 바닥에 떨어뜨려서 액정이 깨지는 일을 몇 번 겪고 나니 현재는 액정을 작은 모델로 바꿨다.
남자는 옷에 주머니라도 많이 달려서 다행이지만, 여자가 입는 옷을 보면 주머니를 찾기가 힘들다. 물론 청바지와 같은 캐주얼 의류에는 있긴 하지만 그 외 옷에는 주머니가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리고 주머니가 있어도 대부분 얕거나 장식용인 경우도 있다. 그러니 주머니에 물건을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놓고 핸드백을 들고 다니게끔 만들어진 여성 의류를 보며 누구를 위해서 저렇게 만들었나 고민하게 된다.
와이프도 외출할 때 편한 옷을 입기도 하지만 가끔 기분을 내고 싶을 때는 차려입기도 한다. 예쁜 옷과 어울리는 핸드백을 들고나가야 하지만, 이때도 카드 2장과 스마트폰만 달랑 챙기는 와이프를 보며 제발 원피스에도 주머니 좀 만들어달라고 소리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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