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미술관]①코인 전에 ‘튤립 광풍’이 있었나니
일확천금 노리는 '튤립' 투기 성행…가격 폭락해 자살까지
테라·루나 폭락에 투자자 망연자실…김남국 의원 코인 투기 의혹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구약성경 전도서 1장 2절
화려한 꽃 뭉치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시선이 닿는대로 찬찬히 음미해봅시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꽃을 그린 그림이지만, 마냥 예쁘지 않습니다. 눈 부신 햇살 아래 있어야 할 꽃이 놓여있는 곳은 창문이 없는 실내입니다. 상단부를 장식한 튤립은 화려하지만 생기가 없습니다. 하단의 분홍색 꽃은 이미 시들고 있네요.
다시 그림 상단부터 하단까지 천천히 시선을 내려볼까요? 아름다움의 절정과 전성기가 시드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도 잠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꽃·과일 등 움직이지 않은 사물을 그린 그림을 정물화라고 부릅니다. 영어 '스틸 라이프(still life)', 이탈리아어 '나투라 모르타(natura morta)'에서 알 수 있듯이 정지된 상태나 죽은 자연을 그린 그림이지요.
정물화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것은 17세기부터입니다. 특히 네덜란드 플랑드르(네덜란드 북부)에서 유행했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플랑드르 지역에서 무역과 유통이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북아메리카·일본 등 해양 무역이 발달하면서 부유한 중산층이 늘어납니다. 이른바 '네덜란드 황금기'라고 불리는 시기입니다.
화가들도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새로 성장한 부유한 중산층의 취향을 반영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이에 역사나 신화 대신 일상의 풍경이나 철학을 담은 정물화와 풍속화가 유행합니다.
16~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보면 꽃 그림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꽃을 그릴 때는 공식이 있습니다. 첫번째 그림처럼 원뿔형 구도를 잡고 가장 아름답고 비싼 꽃을 맨 위에 그려넣는 것입니다.
정물화를 보면 튤립은 대부분 제일 윗쪽에 그려져있습니다. 당시 튤립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튤립은 원래 네덜란드에서 자생한 꽃이 아니었습니다. 중앙아시아 톈산산맥에서 자라던 튤립이 오스만 제국(터키)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넘어왔습니다.
그러다 플랑드르의 식물학자 샤를 드 레클루제가 1593년 네덜란드에 튤립 구근을 가져오면서 처음 알려졌습니다. 특유의 모양과 화려한 색을 담은 튤립은 금세 네덜란드인의 마음을 앗아갔습니다. 꽃이 피기까지 3~7년이 걸리다 보니 가격도 매우 비쌌답니다. 튤립 중에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특이한 모양과 색을 지닌 채 개화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튤립'이 대표적입니다. 그림에서 보여지듯 한 송이에 흰색과 붉은색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돌연변이 품종이라 흔치 않았습니다. 이런 희소성 덕분에 가격이 치솟았습니다. 곧 튤립은 사치품으로 자리매김합니다.
튤립을 그린 정물화를 볼 때마다 인스타그램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오마카세 사진을 올리고 명품 구매를 자랑하듯 튤립 정물화를 통해 은연중에 부를 과시한 겁니다.
일확천금 튤립 투기… 세계 최초의 버블
튤립은 곧 사치품에서 투기 대상으로 변합니다. 이른바 '식테크' 수준이 아니라 튤립 구근에 대한 선물 거래까지 생깁니다. 1634년에 이르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희귀한 튤립 구근 하나가 토지 약 3만6423㎡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거래됩니다. 축구장(약 7100㎡) 약 5개에 맞먹는 규모입니다.
광기 어린 버블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1637년 2월 3일 튤립 가격이 갑자기 폭락했습니다. 튤립 가격이 무섭게 떨어지자 튤립 대금으로 받은 어음은 모두 부도가 납니다. 뒤늦게 튤립 투기에 나선 사람들은 큰 손실에 자살까지 합니다. 결국 네덜란드 의회가 모든 튤립 거래를 중지합니다. '튤립 공황'은 역사상 첫 버블로 기록됩니다.
테라·루나 폭락…일확천금 노린 욕망을 파고든 사기
16~17세기 튤립 투기는 코인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격이 오르고, 가격이 오르니까 (가격 상승 기대감에) 추격 매수하는 식입니다.
테라·루나는 튤립 버블처럼 한 순간에 폭락한 코인입니다. 암호화폐 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기였던 2019년 '스테이블 코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한 때 코인 시가총액 10위까지 올랐습니다.
테라는 달러화에 1대1로 가치를 고정해 가격 안정성을 보장한다며 많은 수요를 끌어모았습니다. 1달러 가치를 담보하는 자산으로 암호화폐 루나를 연동했는데, 테라 가격이 하락하면 루나가 통화량이 늘어나는 모순된 구조였습니다. 10만원 수준에서 거래됐던 루나는 99% 넘게 폭락했고 튤립 버블처럼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습니다.
코인으로 400억원을 벌었다가 돈을 모두 잃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많은 돈을 왜 현금화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대출 없이 강남에 빌딩을 사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일이 잘못됐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 분은 원래의 직업으로 돌아가 묵묵히 일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김남국 의원이 코인 투기 의혹을 받으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허무합니다. 돈, 젊음, 권력, 아름다움 모두 한순간이라는 교훈을 담은 정물화가 있습니다. 이를 '바니타스'라고 부릅니다. 정물화 중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는데, 튤립 광풍이 한창이던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습니다.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허무'를 의미합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신교 세력이 큰 지역이었습니다. '금욕'을 주요 교리로 강조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마냥 부(富)에 대한 욕망을 드러낼 수 없었지요. 경제 성장으로 부유한 중산층이 늘면서 부에 대한 욕망이 팽배하던 시기에 이를 성찰하는 '바니타스' 정물화가 유행한 측면도 있습니다. 부를 욕망하되,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성찰하라는 '바니타스'의 주제는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관통하는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황윤주 기자 h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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