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인간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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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삶을 담은 이야기로남아 우리 곁에 머물렀다가후손에게 길게 이어진다주변 어른들이 세상을 뜨면서 장례에 참석할 일이 잦아진다.
"유령들은 기념일을 좋아한다. 그들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가족들에게, 무엇보다 자신의 혈통을 전혀 모르거나 심지어 혈통 따위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 떠난 날이 다가오면, 우리 안에서 울컥한 그리움이 샘솟는 것이고, 친척 소식을 듣거나 언론 기사를 접하면 나도 몰래 아이들에게 그들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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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우리 곁에 머물렀다가
후손에게 길게 이어진다
주변 어른들이 세상을 뜨면서 장례에 참석할 일이 잦아진다. 얼굴을 내밀고, 부의를 전하고, 고인께 예를 표하고, 유족을 위로하고, 국밥 한 그릇 먹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옛 친구나 동료를 만나서 안부 묻고 수다 떨기도 한다. 애도는 작게 오그라들고, 예의만 앙상히 남은 듯한 장례 풍경이 사뭇 불편하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유대 랍비인 델핀 오르빌뢰르의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 따르면 장례식장을 찾아 유족을 만나고, 그 곁에서 함께하는 시간은 거룩한 시간에 속한다. 히브리어로 ‘거룩한’을 카도시(kadosh)라 한다. 카도시는 본래 ‘구별되다’란 뜻이다. 장례를 치르면서 죽은 이를 애도하고 기억하며, 남은 자를 위무하는 이 시간은 구별되는 시간이다. 일상의 시간이 끊어지고 새로운 시간이 열리는 까닭이다.
유대 전통에서는 죽고 나서 매장되는 순간까지 시신 곁에 촛불을 켜둔다고 한다. 촛불은 죽은 자가 내뿜는 영혼의 빛을 상징한다. 몸은 죽었으나 영혼은 아직 살아서 며칠간 눈부시게 존재를 드러낸다. 장례에 감으로써 우리는 이 빛의 의미를 해독하는 데 참여한다. 기억의 책갈피를 뒤지고, 유족이나 고인의 친지들이 보이는 말과 행동을 종합해 이 빛을 죽은 자의 인생 이야기로 고쳐 쓴다. 죽음이 그 생명을 모조리 삼켜 없애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오르빌뢰르는 이야기가 “시간 사이와 세대 사이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존재할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고 말한다. 거룩한 이야기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 통로를 연다. 사람은 죽음으로 삶을 몽땅 끝맺지 않고, 이야기로 남아서 우리 곁에 머물렀다가 아이들, 후손에게 길게 이어진다. 이야기가 있는 한 죽음은 없다.
햄릿의 아버지가 “나를 기억하라”고 부르짖으면서 밤마다 성벽 위를 배회하듯, 가끔 죽은 자는 유령의 형태로 우리 곁에 되돌아온다. 히브리어에서 유령은 루아흐 레파임(rouH’ refaim)이다. 이 말은 ‘늘어진 영혼’ 또는 ‘올 풀린 영혼’을 말한다. 자기 삶을 담은 이야기의 솔기가 떨어져서 너덜너덜해졌을 때, 살아남은 자들이 그 이야기를 손보아서 고쳐 달라고 유령은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난다.
오르빌뢰르는 이렇게 말한다. “유령들은 기념일을 좋아한다. 그들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가족들에게, 무엇보다 자신의 혈통을 전혀 모르거나 심지어 혈통 따위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 떠난 날이 다가오면, 우리 안에서 울컥한 그리움이 샘솟는 것이고, 친척 소식을 듣거나 언론 기사를 접하면 나도 몰래 아이들에게 그들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다. 유령들은 우리의 삶에 매달리고 들러붙어 “우리 이야기와 그들 이야기를 봉합해 줄 모자란 실”을 찾고, 서로 다른 두 옷감을 단단히 하나로 이어붙이도록 이끈다. 여러 사람을 넘나들며 이 옷감들이 충분히 연결됐을 때 그 위에서 한 집안의, 한 사회의, 한 국가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살면서 우리는 무수한 죽음과 마주친다. 우리 곁에 늘 죽음이 있음을 깨닫고, 우리 앞에 죽음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면서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나 구원 또한 우리 곁에 언제나 존재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죽어도 죽지 않도록, 망각의 틈새에 영원히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준다.
애도란 죽은 자의 삶을 충분히 말하는 행위다. 빈소에서 나누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여전히 그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 역시 언젠가 이야기로 남아서 누군가의 인생 비단에 짜인 크고 작은 문양이 될 테다. 그러니 장례가 죽은 이의 삶을 말하지 않는 부산하고 공허한 시간에서 그 영혼의 빛으로 인생 비단을 짜는 거룩한 시간이면 좋겠다. 죽은 이를 위해,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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