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칼럼] 네오 르네상스와 새로운 사회문화 질서
요즘 신문이나 TV뉴스에서 피동으로 표현되어야 할 말을 모두 능동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태풍이 확산되는” 것이 아니고 “태풍이 확산하고”, “고물가로 소비심리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고 “고물가로 소비심리가 약화하고”, “논란이 확산되자” 대신 “논란이 확산하자”라고 표현한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사람의 관점에서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객체인 현상이 주체가 되는 표현이 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대접을 받기도 한다. 고객을 존대하기 위해 카페에서 “커피가 나오시고”, “빈자리가 있으시고”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회의에서도 “의견이 있으면”이 아니라 “의견이 있으시면”이라고 한다. 존칭을 사용하려면 “의견을 갖고 계시면”이라고 해야 하는데 객체를 주체로 만들어 존칭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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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혁명으로 기존 질서 재편
무시됐던 객체 주체화되며 혼란
새로운 주체의 권력남용 우려도
네오 르네상스 신질서 만들어야
」
그동안 객체를 너무 무시했던 것도 문제였다. 지구에서 주체였던 인류가 20세기에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하면서 우리가 아끼고 가꾸면서 활용해야 할 객체인 지구가 몸살을 앓게 되어 공해, 쓰레기, 기후위기 등 인류의 지속가능성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객체를 홀대하고 착취하게 되면 결국 주체도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주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개와 고양이도 객체였던 애완견의 자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반쪽이라는 반려(伴侶)의 대접을 받으며 주체로 등장했다. 어릴 때 읽었던 이솝우화 “팔려가는 당나귀”가 떠오른다. 당나귀를 몰고 가다가 힘이 들어 아들을 태우고 가니까 자식이 버릇없다고 해서 아버지가 타고 가니 어린 자식이 불쌍하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이 함께 타고 가니까 당나귀를 학대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두 부자가 당나귀를 메고 간다는 이야기다.
애완견을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풍경도 종종 보게 된다. 말 못하는 애완견에게 자신을 엄마, 아빠로 칭하는 주인도 흔하다. 며칠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 아기를 축복해주세요”라고 강아지를 갖고 온 여성을 나무라며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리는데 나에게 작은 개를 가져왔느냐고 비판했다고 한다. 이전에도 교황은 일부 가정이 아이를 낳기보다 애완동물을 기르고 있는 현실을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심지어 동물과의 관계 맺음이 아이들보다 더 쉬워, 자녀보다 동물을 우선시하는 ‘문화적 퇴보’ 현상이 나타났다고 교황은 한 인터뷰에서 한탄했다.
르네상스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하나님이 사회질서의 중심이었던 중세시대를 벗어나 인간 중심으로 사회질서가 재편된 문화혁명이었다. 이는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성서번역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확산되었다. 지금 다시 인류문명사에 네오 르네상스의 시대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디지털 혁명에 의한 SNS,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의 발달로 다양한 의견이 손쉽게 일반대중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사회시스템에서는 잘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가감 없이 대중에게 전달되면서 기득권 세력이 도전을 받게 되었다. 객체의 주체화뿐 아니라 소외되었던 다양한 주체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모이제스 나임(Moises Naim)은 『권력의 종말』시대가 왔다고 설명한다.
학생과 교사, 고용인과 피고용인, 주인과 고객, 장애인과 비장애인, 노인과 청소년 등 다양한 사회관계에서 영향력이 변하면서 기존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2017년부터 성소수자들을 위해 모든 공공건물에 성중립 화장실을 설치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하지만 남녀 구별 없는 화장실 때문에 많은 여성은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이름 뒤에 자신의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 표시를 해야 한다. 생물학적 성(sex)보다 사회적 성인 젠더가 사회관계에서 우선시된 것이다.
권력이 적은 위치에 있던 개인이나 집단이 새로운 권력을 갖고 남용할 때 갈등이 유발된다. 일본 아키타현의 한 관광버스 회사는 고객들의 지나친 갑질에 대해 “손님은 신이 아니다”라는 신문광고를 게재했다. 고객에 의해 회사나 종업원이 지나치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최근 우리나라 교육계의 한 조사에 의하면 지난 1년간 교사 이직이나 사직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답한 교사가 87%에 달하고, 교직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답이 68%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 5년간 교사 26.6%가 교권침해로 정신과 치료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학생이나 학부모가 교사를 희롱하고, 폭행하고, 고발하는 것을 뉴스에서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이제 객체의 존재도 인정하고 기존에 소외되었던 개인과 집단의 목소리도 존중해야 하지만 이로 인해 또 다른 권력관계가 발생하고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네오 르네상스 시대에 객체와 주체, 소수와 다수가 서로의 위치를 지키며 상호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는 사회적 질서를 지혜롭게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우리가 풀어야 할 필수과제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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