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책 없는데 이낙연 책 들어왔다…'분열 현장' 된 평산책방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서가엔 본인 인세 받는 책 빼곡
연일 민주당 지지자 몰리지만
팬덤간 갈등 확산 창구 역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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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위한다는 주민 없는 책방
처음엔 책 하나하나 찬찬히 둘러볼 생각이었다. 막상 책방에 가보니 생각이 바뀌어 한 바퀴 쓱 둘러보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 넓지 않은 실내공간 안에 마침 지역 방송국에서 나온 취재인력까지 뒤섞여 제대로 책 구경하기가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책방 절반이 '문재인의 책''문재인이 추천합니다' 등 문 전 대통령 관련 섹션으로 이뤄져 있어 '문 전 대통령이 직접 인세를 받는 책이 이렇게나 많았나' 하는 깨달음 외엔 딱히 살펴볼 만한 게 없는 게 더 큰 이유였다. 심지어 문 전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직접 "마을주민을 위한 작은 도서관"이라며 사진까지 찍어올려 홍보했던 책방 안 '평산작은도서관'조차 정치색 짙은 본인 소장 책 1000여 권을 꽂아둔 벽면 한쪽의 서가가 전부였다.
잘 알려진 대로 이곳 평산마을은 많은 시골 마을이 그렇듯 주로 70~80대인 고령층 100여명이 주민의 전부인데, 책 목록에서부터 공간 구성에 이르기까지 대체 어떤 주민을 염두에 뒀다는 것인지 의아했다. 독서용 테이블이나 의자는커녕 바닥에 퍼질러 앉아 책 볼 수 있는 공간조차 없는데 왜 굳이 '도서관'이라고 이름 붙였는지도 궁금했다. 관공서에 비치된 그 흔한 노안용 돋보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인근 주민이 평소에 단 한 명이라도 순수하게 책을 보러 이 책방에 들를까, 누구라도 그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올 초 언론 인터뷰를 통해 책방 구상을 처음 밝혔을 때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평산마을을 비롯해 인근 마을주민들이 언제든지 책방에 와서 책 읽고, 차도 마시고, 또 소통하는 사랑방"이라며 늘 '주민'을 내세웠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이렇듯 주민은 철저하게 배제된 느낌이었다.
유료 멤버십에 값비싼 커피값
도난방지기가 설치된 좁은 출입문을 빠져나오면 마당엔 '평산책사랑방'이라 이름 붙은 평산책방이 운영하는 야외 카페가 있다. 햇볕 내리쬐는 초여름 날씨라 목이 말라 시원한 음료를 주문했다. 젊은 사람들한테는 익숙할지 모르지만 고령층이라면 쉽지 않을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해야 주문이 가능한 키오스크를 통한 주문 방식이었다. 가격은 라떼 한 잔에 4500원. 문 전 대통령 반려견 이름을 딴 토리라떼(6800원)보다는 싸지만 값비싼 임대료를 내야 하는 땅값 비싼 도심 매장도 아니고, 로얄티를 내야 하는 프랜차이즈 카페도 아닌 걸 고려하면 꽤 비싼 편이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지지자들이야 물론 기꺼이 커피값을 지불하겠지만 전직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카페 매출을 올려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책방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연히 지역 카페와 식당도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처럼 평산책방 스스로가 방문객의 소비를 빨아들이는 구조로 보였다.
마치 팬미팅에 참석한 아이돌 가수처럼 빨간색 저지선 뒤로 줄 지어선 사람들과 악수를 하며 발길을 옮기던 문 전 대통령이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함께해요 끝까지 세상 끝까지 Only 문재인'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문재인 공식팬카페 '문팬'의 파란색 모자를 쓴 한 여성 자원봉사자가 서점 앞을 가로막았다. 인원통제에 나선 것이다. 책방 건물을 빙 둘러 다시 길게 줄이 생겼다. 이 봉사자는 연신 외쳤다. "책을 사신 분들은 그냥 곧장 들어가서 문 대통령님과 악수하시고 사진 찍으시면 되고요, 책을 안 사신 분들은 먼저 책을 구매하시고…. " 그냥 책만 사려는 사람은 책방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문 전 대통령이 방문객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대화하고 사진 찍느라 100m 정도 길게 늘어선 줄이 다 사라질 때까지 거의 1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사람들은 모두 문재인 친필 사인이 인쇄된 봉투를 들고 서점 밖으로 나와 문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서로 나눠보면서 신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손에는 문재인 봉투가 보통 두세 개씩 들려 있었다. 방문객들의 이런 열성적인 책 구매로는 모자란지 평산책방은 프런트에 가입비 1만원의 회원을 모집 중이라는 브로슈어를 쌓아두었다. 할인은 없고 다음번 책 구매 시 쓸 수 있는 5% 적립금을 쌓을 수 있는 게 혜택의 전부다.
지난달 25일 개업을 알리며 문 전 대통령이 직접 페이스북에 공개한 편지에서 "수익은 전액 재단에 귀속되고, 이익이 남으면 평산마을과 지산리 그리고 하북면 주민들을 위한 사업과 책 보내기 같은 공익사업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 지지자가 SNS에 올린 영수증 한 장 탓에 문 전 대통령이 처음 밝힌 것과 달리 재단이 아닌 문재인이라는 개인사업자가 책방 수익을 가져간다는 사실이 알려져 한때 논란을 빚다가 결국 개인사업자는 폐업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익이라는 명분에 비해 책방 수익 올리기가 과도하다는 인상은 어쩔 수 없었다.
분열의 현장
평산책방과 관련해 문 전 대통령이 마주한 가장 큰 비판은 소소한 돈벌이가 아니라 "잊히고 싶다"던 퇴임 당시 약속을 왜 스스로 깨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속에서 “(여권이) 끊임없이 저를 현실정치로 소환하고 있으니까 (잊히고 싶다는) 그 꿈도 허망한 일이 됐다”며 “끊임없이 저를 현실정치 속에 소환하게 되면 결국은 그것이 그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조용히 살고 싶은데 여권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책방을 아주 잠시만 둘러봐도 이 발언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여권의 소환 탓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잊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어서다.
선거 철도 아닌데 평산책방은 이미 민주당 의원들이 지지자들을 모아 순례하는 성지가 됐다. 지난달 25일 김경협 의원(경기 부천갑)을 필두로 장철민 의원(대전 동구) 등이 찾았고, 이날 역시 김용민 의원(남양주병)도 지지자 20여명과 함께 단체로 책방을 찾아 인증 단체사진까지 같이 찍었다. 다음날인 10일엔 이재명 당 대표 등 당 지도부와 임종석·노영민 청와대 전 비서실장, 김영주·이인영·전해철·한정애·황희 의원 등 문재인 정부 시절 장관 출신도 모습을 보였다. 우원식 의원(노원을) 등은 아예 오는 21일 5만원의 참가비를 받고 책방을 함께갈 방문객을 플래카드까지 걸고 모집하고 있다.
이쯤되면 대체 누구를 위한 책방인지,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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