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추경 않는 추경호
회계사가 대한민국 가계부를 점검한다면 “돈 쓸 곳은 많은데 현금 흐름이 팍팍하다”고 결론 내릴 것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해 들어 3월까지 걷힌 국세는 87조1000억원이다.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24조원 줄었다. 세수(稅收) 진도율(연간 목표 대비 징수실적)은 1분기 기준 21.7%이다. 2000년 이후 가장 낮다.
‘세수 펑크’를 우려해 추가경정예산안(추경)을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017년 660조원이던 국가 채무는 지난해 1068조원 규모로 불었다. 빚을 더 내(국채 발행) 추경 재원을 마련하는 건 현 정부가 추진하는 ‘건전 재정’ 기조에 역행한다. 가계부를 잘못 짰다면 허리띠를 졸라매 불필요한 지출부터 줄이거나, 수입을 늘려야 정상인데 손쉽게 빚낼 생각부터 한다.
추경은 비상시 쓰는 최후의 수단이다. 국가재정법은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 경기 침체, 대량 실업 등을 추경 편성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세수 부족은 법이 허용한 추경 편성의 요건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추경을 편성하자는 목소리가 거세도 컨트롤 타워가 굳건하면 된다. 문재인 정부 시절 확장 재정을 비판하며 “추경호가 아니라 ‘추경 불호(追更 不好)’로 불러 달라”던 추경호 경제부총리의 추경 관련 언급이다.
“지난 정부처럼 추경을 손쉽게 생각하는 정부가 아니다. 제가 (부총리로) 있을 때는 그런 추경을 하지 않을 것이다.”(지난해 12월 27일), “5월, 6월 지나고 추경 이야기를 꺼내면 꺼내지 지금은 아니다.”(2월 10일), “예산을 편성한 범위 내에서 먼저 대응하고, 도저히 여의치 않으면 국회에 상의하겠다”(4월 17일).
“추경은 없다”고 전제하긴 했지만, 확고했던 ‘추경 불호’ 기류에 몇달 새 미묘한 변화가 읽힌다. 가장 최근인 지난 4일 “현재 추경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언급은, ‘곧’ 추경을 검토할 수 있다는 얘기로 들렸다. 추경 편성 말고는 대규모 세수 펑크를 막을 뾰족한 수단이 없더라도 ‘하는 데까지 해 보고’ 안 되는 것과, ‘노력도 안 해보고’ 무너지는 건 차이가 있다. 전기·가스요금 인상을 머뭇거리다 찔끔 올리고, 유류세(油類稅) 인하도 그대로 연장하면서 추경을 편성하는 건 ‘노력도 안 해보고’에 가깝다.
상황은 나빠지는데 내년 총선의 계절이 다가온다. 포퓰리즘성 추경 요구가 거세질 수 있다. 비록 무너지더라도 국민이 체감할 만큼 “원칙대로 거두고, 최대한 아껴 썼다”는 평가는 들어야 하지 않을까. 추 부총리마저 전임자처럼 떠밀리듯 추경한다면 ‘추경호(追更好)’란 별명이 붙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김기환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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