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청빈 호소인
공자의 제자 안회는 학문이 뛰어났지만 지독한 가난으로도 유명했다. 워낙 가진 게 없어 끼니를 거르는 일이 허다했는데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논어』 옹야편엔 공자가 이런 안회를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살면 다른 이는 근심을 견디지 못할 진데 안회는 즐거움을 잃지 않으니 참으로 어질다.” 청빈한 선비를 이르는 ‘단사표음(簞食瓢飮)’이 여기서 나왔다.
공직자 재산공개 첫해였던 1993년 조무제 전 대법관은 신고 대상 고위법관 103명 중 꼴찌를 했다. 당시 그의 재산은 25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포함해 겨우 6400만원이었다. 5년 뒤 대법관에 임명될 때도 7200만원에 불과했다. 퇴임 후엔 ‘전관’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교수직을 택했다. 법원조정위원으로 근무할 때는 일에 비해 수당이 너무 많다며 삭감을 요청한 적도 있다.
꼭 가난해야 청빈한 것은 아니다. 김장하 전 진주 남성당한약방 원장은 부자여도 재물이 목적이 아닌 삶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그는 한약방을 하며 번 100억원 넘는 돈을 수십 년에 걸쳐 아낌없이 나눴다. 지역사회 고학생과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을 도왔고, 차별과 불평등이 있는 곳엔 어디든 나섰다. 자신을 위해 남긴 건 작은 집과 허름한 양복 몇 벌이었다.
청빈의 형태는 다양해도 관통하는 공통점은 있다. 그런 삶을 당연하게 여길 뿐, 절대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족한 환경조차 충분하다 여겼던 안회는 결국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조 대법관은 ‘딸깍발이 판사’란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법관이 그런 식으로 포장되는 걸 경계해서다. 김 원장은 자신을 알리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다. 연초 김 원장의 일생을 다룬 책이 출간됐는데 제목부터 『줬으면 그만이지』다.
청빈 호소인의 등장은 그래서 생경하다. 매일 라면을 먹고, 낡은 운동화를 신고, 20년 동안 같은 안경을 쓰고, 아버지가 물려준 차를 탈 만큼 아끼고 살았다던 한 국회의원이 가상화폐 투자 의혹으로 수사 대상이 됐다. 현대판 단사표음인 줄 알았는데 계좌에 수십억을 쌓아둔 걸 보면 돈이 없어 라면을 먹은 건 아닌 듯하다. 사법적 판단은 둘째 치고 가난을 모독한 죄는 형량이 꽤 길 것 같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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