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보이 슬립스' 앤소니 감독과 최승윤 배우의 조우
Q :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앤소니 심 감독의 반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두 번째 장편영화입니다. 1990년대 밴쿠버 이민자의 삶을 그리기로 결심한 계기는
A : 앤소니 심(이하 심) 어릴 때부터 TV나 영화를 보며 ‘왜 나처럼 생긴 사람이 없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어요. 한국인 이민자를 다룬 작품이 거의 없어요. 몇 있는 아시아인 영화나 드라마는 제가 겪었던 현실과 너무 다른 이야기였죠. 이민자의 삶을 가장 잘 아는 제가 직접 영화를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어릴 때 캐나다로 이민 간 저의 삶과 경험, 생각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Q : 시나리오 쓸 때 이야기와 감성이 맞는 앨범을 골라 듣는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Jo′nsi & Alex Somers’의 〈Riceboy Sleeps〉 앨범을 들었다고요
A : 심 시나리오 쓸 때 제목이 없으면 갈피를 못 잡겠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쓰기 전 제목 지을 때 음악을 참고해요. ‘라이스보이’는 부정적으로 쓰이는 단어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단어가 주인공 ‘동현’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계기로 표현될 수 있겠더라고요. 영화 후반부에 강원도에서 동현의 뿌리인 진짜 가족을 만나 정체성이 깨어나면서 마무리되거든요.
Q : 비슷한 소재나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가 있는지
A : 심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제작하기 전, 대부분의 스태프에게 반드시 보라고 권유한 영화들이 있어요. 〈박하사탕〉 관람은 필수였고요. 대만영화 〈Dust in the Wind〉(연연풍진)는 산속 작은 마을에서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섬세하게 다룬 영화인데, 연출이 아름다워 참고했어요.
A : 최승윤(이하 최) 2018년 이탈리아영화 〈행복한 라짜로〉도요. 감독님께서 이 영화의 카메라 느낌과 색감, 시대를 초월하는 연출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죠.
A : 심 네, 그 영화를 촬영한 카메라와 렌즈가 〈라이스보이 슬립스〉에도 동일하게 사용됐어요.
Q : 승윤 배우는 처음 각본을 읽고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A : 최 저는 이민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이민자 이야기가 먼저 와닿기보다 ‘동현’과 ‘소영’의 모자관계가 저를 더 감동시켰어요. 경험은 없지만 모르는 감정을 억지로 만들지는 않았어요. 아들이 없어도 작품에서 아들 역이었던 배우와 실제로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자연스럽게 가족만큼의 애정이 생겼어요. 그 애정을 바탕으로 엄마와 아들의 연기를 할 수 있었죠.
Q : 캐나다라는 낯선 곳과 부딪혀야 하는 이민자이자 어린 아들의 하나뿐인 양육자인 소영을 표현하며 제19회 마라케시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죠. 연기하는 과정에서 엄마나 할머니 모습을 떠올렸다고요
A : 최 맞아요. 외할머니가 정말 전투적인 삶을 사셨어요. 그래서 한이 많으시죠. 자신의 인생을 억울해하시고요. 각본 읽으면서 할머니의 치열했던 삶이 떠올랐고, 촬영 가기 전까지 할머니의 인생과 엄마로서의 삶에 대해 끝없이 질문했어요.
Q : 특히 어떤 대사에서 두 분을 절실히 떠올렸나요
A : 최 소영이 정말 강인한 여자라고 확실히 느낀 장면이 있어요. 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고도 펑펑 울지 않고 냉정을 유지하면서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되죠?”라고 의사에게 되묻는 장면이에요. 내가 암에 걸렸지만 그 다음 해결책을 찾는 정신력에 놀랐죠.
Q : 소영이 느꼈을 고통은 가늠하기 어렵죠
A : 최 소영이 아주 외로웠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게 자신의 인생이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인물이에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저 사람은 저러고 어떻게 살아?’라는 생각이 들 만큼 어렵게 사는 분들이 있어요. 지인 중에 몇 달 동안 책상에서 잔 사람도 있거든요.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그게 현실이니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고 말해요. 너무 최선을 다하느라 힘듦을 한탄하며 자기연민에 빠질 시간이 없다고 덧붙이더라고요.
Q : 동현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강원도로 돌아와 남편 산소 앞에서 동현을 소개합니다. 그런 후 소영은 하늘을 향해 소리치죠. 당시 소영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A : 최 엄청 후련하면서도 이번 생은 열심히 살았구나 깨달으면서 서러웠을 거예요.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에 소리치면서, 아파하면서 모든 한과 고통을 흘려보낸 거죠. 캐나다가 배경인 장면에선 젊고 전투력 높은 소영으로 임했는데, 강원도에선 늙고 쇠약한 소영이지만 연기하는 마음만은 편안했어요.
Q : 감독님은 소영 역할에 확신을 심어준 배우는 최승윤이 유일했다고 말했죠. 그에게서 어떤 힘을 발견했나요
A : 심 오디션 현장에서 곧바로 확신했어요. 오디션은 동현을 불공정하게 대하는 교장 선생님과 소영이 맞서 싸우는 장면으로 진행됐어요. 소영은 교장 선생님과 대면해 잔뜩 겁먹은 상태지만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여야 했어요. 승윤 배우는 긴장 상태를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표현하면서도 눈빛은 날카롭고 당당하게 표현했죠. 이런 연기는 배우가 일부러 의도한 것도, 제가 알려준 것도 아니었어요.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죠. 저는 승윤 씨가 이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어요.
Q : 어린 동현(도현 노엘 황)과 큰 동현(이든 황)을 섭외한 과정도 궁금해요
A : 심 어린 동현의 나이대에 맞는 한인 교포 아이를 찾는 건 어려웠어요. 무조건 한국인이어야 했고,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어를 잘 구사해야 했죠. 캐나다 한인 신문에 광고도 올렸어요. 연기 경험이 없어도 괜찮으니 말하는 영상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지원자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밴쿠버에 사는 ‘도현 노엘 황’으로부터 연기 영상을 받았어요. 정확히 어린 동현과 딱 들어맞았죠. 큰 동현을 맡은 ‘이든 황’은 토론토에 사는 한인 배우 친구예요. 둘 다 황 씨라 더욱 가족처럼 느껴졌어요.
A : 최 특히 이든 황은 정말 연기를 잘했어요. 섬세한 사춘기 청소년의 느낌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잘 살려줬죠.
Q : 영화 배경은 캐나다와 한국의 강원도입니다. 강원도를 택한 이유는
A : 심 외갓집 고향이 강원도예요. 촬영지는 할아버지가 나고 자란 곳으로, 양양에서 마을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해요. 캐나다에서 자라면서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땅, 언어, 이름 모두 내 것이 아니었죠. 그러다 한국에 돌아왔더니 친척과 가족이 있고, 강원도에서 할아버지와 교감하며 나의 땅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어요. 저는 뿌리의 존재가 간절했거든요. 캐나다와 강원도에서 겪었던 상반된 기억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 영화에서 강원도를 선택한 것보다 더 중요한 포인트는 이민자가 한국으로 돌아가 정체성을 되찾는다는 거예요
Q : 캐나다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장면에서 화면 비율이 넓어집니다. 동시에 절경이 펼쳐지죠
A : 심 드디어 소속감과 뿌리를 찾았을 때의 평온함을 표현하고자 비율을 넓혔어요. 단 나흘 만에 강원도 신을 찍어야 했는데, 마침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A : 최 맞아요. 추수 직전이어서 벼가 완벽한 황금색이었고, 날씨나 개구리 울음소리, 잠자리 떼 등 모든 게 완벽했어요. 4일 동안 일사불란하게 촬영했지만, 하루하루가 아까울 만큼 행복했어요.
Q : 소영과 동현이 살던 밴쿠버 집은 어떻게 구했나요
A : 심 실재하는 집이에요. 1990년대에 지어진 전형적인 밴쿠버 주택으로, 밴쿠버 사람들은 촌스럽게 여긴다고 해요. 방마다 다르게 도배한 정신없는 벽지와 거대한 카펫을 그대로 살려둔 집을 누가 내놓은 거예요. 그 집주인이 오랜 세월 아무것도 수리하지 않았더라고요. 우린 그 집을 반갑게 환영했죠(웃음). 재건축된 집이 많아서 어렵게 구했거든요.
Q : 두 사람에게 집은 어떤 공간인가요
A : 최 저는 이사 경험이 손에 꼽아요. 부모님은 제 돌잔치를 했던 동네에 아직도 사시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 간 아파트에 그대로 머물고 계시죠. 그러니까 이사를 딱 두 번 정도 한 거죠. 잠깐 해외에 거주하거나 서울에 독립하기 전까지 본가에서 살았어요. 저에게 집은 느티나무처럼 늘 그곳에 있어 안정감을 주는 존재예요.
A : 심 반면 저는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가 저에겐 여덟 번째 전학이에요. 잦은 이사 경험의 장점은 어디든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호텔도 낯설지 않죠.
A : 최 역설적이게도 집에 대해 질문하는 분은 감독님이잖아요.
A : 심 그런 이유로 제가 궁금해했어요. 나의 집은 너무 많아서 안정을 느낄 수 없었고, 그 안정감을 어디서 느끼는지 생각해 봤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안정감이 있더라고요. 관객들이 캐나다와 한국 중 어느 곳이 진짜 집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둘 다 집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 집이죠.
Q : 마지막 소영의 대사가 ‘이제 집에 가자’죠
A : 심 맞아요. 캐나다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 집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집은 물리적 공간이기보다 관객에게 열린 은유이지 않을까요.
A : 최 감독님이 얼마 전에 결국 집이라는 건 자신의 뿌리일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듣고 보니 열린 결말이 될 수도 있겠군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동현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라 소영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여행이었던 것 같아요. 남편의 자살이라는 아픔을 가진 소영이 외면하고 버렸던 과거와 다시 화해하는 여행이었다고 생각해요.
Q : 영화를 제작하며 서로에게서 어떤 힘을 얻었나요
A : 최 첫 장편영화이자 주연인 작품을 심 감독님과 함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연기에 대한 요청이 많은 감독님이었다면 집중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연기를 배운 적 없어서 “이렇게 연기해 보세요”라는 말을 못 알아듣거든요. 심 감독님은 연극을 오래 했고, 배우들과 오래 작업했기 때문에 촬영할 때 디렉션을 주기보다 배우가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더라고요. 감독님의 그런 성향이 소영 연기에 도움이 됐어요.
A : 심 승윤 씨는 소영을 빨리 이해했고, 믿고 맡길 수 있는 배우였어요. 승윤 배우뿐 아니라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모든 배우와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즐겁게 촬영했어요.
Q : 어떤 장면에 유독 애정을 느끼는지
A : 심 강원도에서 아들 동현, 엄마 소영,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 함께 모여 점심 먹는 장면이죠. 아주 자연스러우면서 완벽했어요.
A : 최 너무 많은데요, 지금 떠오르는 건 동현과 소영이 남편 산소 가서 인사하는 장면이에요. 유일하게 카메라가 멈춰 있고, 정말 독특한 각도로 두 사람을 비춰요. 대사도 없어요. 그 정적이 좋았어요. 가장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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