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기술력’ 우위…美 엔비디아 제쳤다
D램·낸드플래시 등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압도적 1위인 한국은 설계가 핵심인 팹리스 분야에서 힘을 못 썼다. 팹리스만 놓고 보면 한국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1% 수준에 그친다. ‘반도체 강국’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퓨리오사AI, 리벨리온, 사피온 등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는 팹리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설계 특화 기업이라는 점이다.
저전력·데이터 동시 처리가 핵심
AI 챗봇 챗GPT 등장으로 수혜를 입은 기업 중 하나가 미국 팹리스 엔비디아다.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사용하는 슈퍼컴퓨터에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 ‘A100’ 1만여개가 사용됐기 때문이다. GPU가 일종의 AI 전용 반도체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GPU는 AI 연산이 아닌 고사양 그래픽 처리를 위해 개발된 제품이다. AI 연산에 활용할 경우 비용, 전력 소모 등에서 효율성이 떨어진다. GPU 대비 범용성은 떨어지지만 AI에 특화된 AI 반도체가 별도 개발되기 시작한 배경이다.
AI 반도체의 주요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일단 데이터 처리 속도가 빠르다. 컴퓨터 두뇌로 알려진 기존 반도체 CPU(중앙처리장치)는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직렬 처리한다. 이 때문에 대규모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AI 반도체는 동시(병렬) 처리 방식이 탑재, 대규모 데이터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전력 효율성이다. AI는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하고 이를 통해 추론한 결과를 도출한다. 데이터가 많다 보니 학습과 추론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특히 추론 부문에서 AI 알고리즘 특유의 계산 패턴이 적용되는데, 전력 소모량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AI 반도체는 이를 최적화, AI 연산 전력 효율을 기존 범용 반도체 대비 1000배 이상으로 높였다. AI 반도체 별명이 AI 가속기인 이유다.
전문가들은 AI 반도체 시장 성장세를 높게 점친다. IT 산업 전반에 AI가 적용되면서, 반도체 산업도 AI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AI 반도체 시장 선점을 위해 전통 팹리스인 퀄컴, 엔비디아는 물론 구글과 아마존, 애플, 테슬라 등도 자체 AI 반도체 개발에 나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AI 반도체 시장 규모는 빠른 속도로 커질 전망이다. 지난해 KDB산업은행 경제연구소가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를 인용해 밝힌 자료에 따르면 AI 반도체 시장 규모는 2019년 135억달러(약 17조원)에서 2025년 768억달러(약 101조원) 수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톱티어 넘어선 ‘퓨·리·사’
국내에서도 다양한 기업들이 AI 반도체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다만 해외와 달리 국내 AI 반도체 생태계를 이끄는 기업은 대부분 스타트업이다. 몸집은 작지만 우수한 인력들로 구성된 덕분에 ‘기술력’만 놓고 보면 글로벌 기업보다 앞서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전기컴퓨터공학 박사 출신으로 미국 인텔과 스페이스X, 모건스탠리 등을 거친 박성현 대표가 창업한 ‘리벨리온’은 2020년 설립됐다. 업력은 짧지만, 리벨리온이 개발한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 ‘아톰(ATOM)’은 엔비디아와 퀄컴의 AI 반도체보다 성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지표’로도 경쟁력을 입증했다. 리벨리온은 지난 4월 세계 최고 권위의 AI 반도체 성능 테스트 대회인 엠엘퍼프(MLPerf)에서도 엔비디아와 퀄컴 제품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리벨리온의 아톰은 언어 모델 분야에서 엔비디아 A2와 T4, 퀄컴 AI100보다 최고 2배 앞서는 처리 속도를 보였다. 이미지를 분석하는 비전 분야 처리 속도에서도 퀄컴과 엔비디아 제품보다 최고 3.4배 빨랐다. 연산을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퀄컴과 엔비디아의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는 의미다. 신성규 리벨리온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아톰이 퀄컴 AI 반도체와 엔비디아 제품보다 우수한 성능을 기록했는데, 언어 모델과 비전 분야를 모두 지원하는 글로벌 톱티어 수준의 경쟁력을 보였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퓨리오사AI도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이 주목하는 스타트업 중 하나다. 퓨리오사AI는 인텔과 삼성전자, AMD 등을 거친 백준호 대표가 2017년 설립했다. 현재는 퀄컴, AMD 출신 반도체 전문가와 카이스트 박사 등 20여명 이상으로 구성됐다. 퓨리오사AI가 만든 컴퓨터 비전용 AI 반도체 ‘워보이’는 이미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통해 생산에 돌입했다. 백준호 퓨리오사AI 대표는 “양산은 개시됐고 올해 6~7월 중 판매를 본격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투자 시장에서도 퓨리오사AI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다. 이에 퓨리오사AI는 시리즈C 라운드를 진행 중이다.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퓨리오사AI는 1000억원 이상 펀딩을 목표로 투자 유치에 나섰다. IB업계에서는 퓨리오사AI 기업가치를 6000억~8000억원 정도로 보고 있다. 설립 6년 만에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에 맞먹는 수준의 평가를 받는 셈이다. 백준호 대표는 “시리즈C를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 중에서는 SK그룹이 AI 반도체에 힘을 주고 있다. SK텔레콤은 2020년 국내 최초로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 ‘사피온 X220’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SK텔레콤, SK스퀘어, SK하이닉스 3사가 SK ICT 연합을 꾸리고 공동 투자해 AI 반도체 설계 기업 사피온을 미국과 한국에 설립했다. 사피온은 올해 하반기 X220 대비 4배 이상 성능을 개선한 X330을 선보일 예정이다. 류수정 사피온코리아 대표는 “올해 기술 측면에서 가장 큰 목표는 X330을 고객들에게 빠르게 제공, 사업 확대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업 확장 원년”…삼성전자 협업 양산
물론 기술력이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파운드리와 협업해 양산에 성공하고, 납품할 고객사를 찾아 ‘사업화’를 이뤄내야 한다. 이에 기술력보다 안정적인 생산망 확보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실제 2020년 X220을 출시, NHN 데이터센터와 협력하고 있는 사피온을 제외하면 국내에선 굵직한 AI 반도체 상용화 소식이 없다. 퓨리오사AI는 양산·판매 단계에 접어든 상태고, 리벨리온은 내년 양산을 계획 중이다.
퓨리오사AI, 리벨리온, 사피온 경영진의 생각은 어떨까. 이들은 지적에 공감한다면서도 여전히 AI 반도체 경쟁력의 핵심은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안정적 공급 능력 확보는 상대적으로 후순위라는 의견도 내비쳤다. 백준호 대표는 “현 상황에서는 기술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안정적인 생산 능력을 확보하는 건 후순위고,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3사가 생산망 확보를 상대적으로 ‘수월한 일’이라고 평가하는 건 국내 반도체 인프라와 관련 있다. 반도체 생태계는 팹리스, 팹리스와 파운드리의 가교 역할을 하는 디자인하우스, 파운드리로 구성된다. 한국은 디자인하우스, 파운드리 분야에서 글로벌 선두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인프라 확보를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실제 3사 모두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협업해 AI 반도체 양산을 준비하거나 개시하고 있는 상태다. 신성규 CFO는 “한국에 창업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삼성전자 파운드리, 세미파이브 디자인하우스 등 튼튼한 반도체 생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류수정 대표도 “사업 확장을 위해 파운드리와 패키징 등 다양한 반도체 파트너들과 협력해 안정적으로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정부 지원도 3사가 기술력에 집중할 수 있는 배경이다. 특히 3사 경영진은 정부가 추진하는 ‘K-클라우드’ 등 신규 프로젝트들이 사업 추진화에 실질적 도움을 준다고 설명한다. K-클라우드는 NHN클라우드·KT클라우드·네이버클라우드가 국산 AI 반도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방안이다. 구체적으로 2030년까지 8262억원을 투입, 국내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국산 AI 반도체 점유율을 8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백준호 대표는 “K-클라우드 사업처럼 AI 반도체를 다양한 기업들과 실증하는 형태의 프로젝트는 제품 경쟁력 개선과 사업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3사는 올해를 사업 확장 원년으로 삼고 있다.
리벨리온은 2024년 아톰 양산을 기대하고 있다. 이를 앞두고 올해 미국 법인을 세우고, 본격적인 해외 시장 수요 확보에 나설 계획이다. 1세대 워보이 양산에 성공한 퓨리오사AI는 올해 6~7월 중 판매를 본격화하고, 2024년 3월에는 2세대 칩까지 출시할 계획이다. 동시에 고객사 확보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다. 사피온도 올해 상반기 500억원 투자 유치를 통해 또 한 번의 도약에 나설 방침이다. 류수정 대표는 “GS 계열사와 대보그룹이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중인 투자 라운드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5월 중 최종 클로징을 예상하고 있다. 포스트머니 밸류(투자 후 기업가치)는 5000억원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09호 (2023.05.17~2023.05.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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